본문 바로가기

최종편집일 2019-12-11 오후 4:36:00

박춘자, 그림과 함께 보낸 인생 이야기
[이경희의 소가 외다리 건너는 이야기]

기사입력 2018-05-04 오후 3:24:15

 

                                  ▲ 송아당 박춘자


운명처럼 만난 고서화와 그림으로 일생을 살다

 

송아당(松芽堂) 박춘자의 집은 작은 화랑이다. 경산시 백천동 월드메르디앙 아파트에 그녀의 집이 있다. 대추나무에 음각으로 새긴 송아당 현판은 집 입구에 수문장처럼 서 있다. 오랜 세월 묵은 빛깔을 자아내는 붉은색이 감도는 대추나무에 음각으로 한자를 새겨 파란색 단청물감을 칠했다. 현판은 박춘자의 인생을 상징하는 증표(證票)이다. 송아당은 서예 스승으로부터 받은 아호이다. 현관에 들어서면 모란꽃이 화사한 민화 액자가 손님을 반긴다. 거실로 들어서면 여기저기 귀한 그림이 걸려 있다. 식탁 옆에는 꽃과 과일 정물화가, 거실 정면에는 소치허유의 매화도와 노송도 그림 두 점이 걸려 있다. 맞은편 벽에는 한눈에 봐도 오래된 십장생도가 있다. 서양화보다 한국화가 많다. 이유를 물어보니 화려한 서양화보다 담백한 한국화가 더 좋단다. 처음 화랑을 시작할 때도 고서화 작품을 위주로 했으니 그의 취향은 한국의 전통정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송아당의 예술적 감각과 화랑 운영의 연륜이 보인다.

 

넓은 베란다에는 화초들이 만발하다. 어떤 식물도 그의 손길만 닿으면 싱싱하게 되살아난다. 새장에는 잉꼬 두 마리가 다정스레 모이를 쪼아 먹는다. 다실(茶室)에 들어서면 다구와 삼층장이 있다. 다구도 그녀의 화랑에서 전시한 작가의 작품인지라 하나씩 들여다보며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벽에는 그녀가 젊은 시절에 쓴 서예족자가 조화를 이룬 가운데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집이라기보다 작은 화랑에 들린 듯 눈요기꺼리가 많다. 집안은 정결하고도 품격이 넘친다. 집이야말로 주인의 취향과 감각, 가치관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던가. 그림과 고서화, 화초 이 세 가지가 그녀의 집을 상징하는 기표였다. 집 구경을 마치고 차를 마시는데 나는 불현듯 이 구절이 떠올랐다. ‘검이불누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즉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백제본기, 삼국사기) 송아당 박춘자의 집이 그랬다.

 

       ▲ 1993년 송아당에서 운보공방 개관
 

 

송아당 박춘자, 그녀는 대구 화랑가의 전설 같은 인물이다. 그녀는 삼십오 년간 대구에서 화랑을 운영했다. 1980년에 고미술 전문 화랑으로 출발하여 2016년 집안 질녀에게 화랑을 넘겼으니 생의 대부분을 그림과 함께 보낸 셈이다. 그림 장사를 해서 자식 공부시키고, 먹고 살았으니 장사치고는 괘 고급스러운 장사를 했다. 한때는 오십여 평이 넘는 큰 화랑에 운보 김기창 전시회, 이왈종 전시회, 광주의 박행보 전시회 등을 개최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유명 작가의 초대전을 위해 광주로 제주도로 강원도로 발품을 파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화랑 전속 작가도 여럿 거느렸다. 대구의 이수동, 김영대, 장이규, 김영식, 이원희 등이 송아당을 거쳐 갔다. 평범한 할머니 같은 그녀가 그림 장사를 삼십오년 간 했다니 처음에는 의아했다. 미술 전공자도 아닌 평범한 주부였던 그녀가 오랜 세월 화랑을 운영한 비결은 무얼까. 사람을 믿었고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이란다. 송아당을 가까이서 수십여 년을 지켜보니 온화한 성품에 욕심이 없다. 어쩌면 그녀의 타고난 성품이 그림 장사와 잘 맞았는지도 모른다.

 

봄이 무르익던 19805, 대구 동성로에 작은 공간을 전세로 얻었다. 그동안 하나씩 사두었던 고서화 작품을 밑천으로 화랑을 열었다. 송아당 화랑의 시작이었다. 1980년대 대구 고미술 애호가들의 안목을 상당히 높았다. 한국전쟁 때 폭격을 피한 대구 양반가에는 고미술이 많이 남아있었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피난 온 시인묵객들이 양반집 사랑채에 묵으면서 남기고 간 작품이 대구를 고서화의 도시로 만들었다. 그 시절 소장가가 찾던 그림은 대가의 작품이었다. 단원, 오원, 혜원, 겸제 같은 유명인의 작품은 나오기가 무섭게 팔렸다. 근대 동양화단의 거목인 청전, 소정, 이당, 의제의 작품도 인기가 좋았다. 귀한 작품을 두고 안목 높은 애호가와 감상의 변을 나누던 시절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화랑 개관이 대구의 작품 수위로 봐서는 다소 늦은 편이었지만, 미술사에 남을 유명 작품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고서화와 골동품이 애호가의 집에 숨어버리자, 화랑가에는 고서화 작품을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1980년대 중반쯤 고서화 작품이 더 이상 시장으로 나오지 않자 화랑운영도 힘들어졌다. 송아당이 소장하던 귀한 서화작품도 하나 둘 손을 떠나자 1982년 서양화 전문 화랑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했다.

 

 

봉산문화거리를 내 손으로 일구다

 

      ▲ 봉산문화예술거리 개막식
 

 

대구의 화랑가는 1970년대 초반부터 동성로 대구백화점 부근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고층건물이 들어서자 임대료가 올라 화랑들이 힘들어졌다. 한옥이 즐비한 봉산동 골목에 표구사와 서예학원, 고서적상, 화랑이 하나둘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 무렵 화랑가에 또 다른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흑백의 한국화를 취급하던 화랑가에 화려한 색채의 서양화가 벽면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그림 붐이 일어나 작품의 호당 가격도 오르고, 화랑에서 갤러리로 명칭도 바뀌었다. 일반 시민들이 화랑을 찾아와 작품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문화의 대중화 시대를 맞아 봉산동 골목은 대구 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편의시설도 미비했고, 주차공간도 부족했다. 서울의 인사동처럼 관광객이 찾아올 수 있는 대구문화거리 조성의 필요성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문화에 관심이 많던 최병윤 당시 중구청장이 승부수를 던졌다. 낙후된 중구를 살리는 길은 문화의 거리를 조성하여 중구를 대구문화의 산실로 만들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문화거리조성의 구체적인 사업과 실행은 화랑들의 몫이 되었다. 송아당은 당시 봉산문화거리 조성 준비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정책은 좋았으나 사업지원금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중책을 맡은 회장으로서 회원을 설득하여 자금을 모으고, 재능기부를 받고, 역할 분담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녔다. 힘은 들었지만 신명이 났다. 대구의 화랑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겼기에 힘든 줄도 몰랐다. 벽화를 그리고, 장승을 세우고, 젊은 화가들이 무보수로 십장생도를 그렸다. 1991년 드디어 대구시와 문화관광부로부터 봉산문화거리 지정을 받았다. 대구시장을 비롯한 기관장들과 나란히 서서 테이프커팅을 하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봉산문화거리조성 준비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화랑협회 회원들이 힘을 모아 문화거리를 만들었다는 자긍심과 기쁨을 느낀 사업이었다.

 

 

결혼 사 년 만에 떠나버린 야속한 사람, 지금도 그립다

 

                    ▲ 신혼여행(), 아들 중학교 졸업식
 

 

박춘자가 태어난 집은 대성초등학교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내당동 언덕 위에 있었다. 위채에는 송아당 식구가 살고, 아래채에는 작은집 식구가 살았다. 침모와 물을 져 나르는 머슴, 한문선생을 두고 살만큼 부유한 편이었다. 뒷마당에는 아버지, 어머니, 오빠, 남동생, 그리고 박춘자 이름이 적힌 명패가 달린 텃밭이 있었다. 앞마당에는 어머니가 가꾸는 꽃밭이 있었다.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는 텃밭을 일구는 대신 온갖 화초를 심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우리집을 꽃집이라 불렀다. 그녀가 훗날 꽃집을 운영한 연원도 이와 무관하진 않으리라. 일제 강점기 그녀의 아버지는 일본을 오가면서 무역을 했다. 집안에는 일본 항아리, 매화문양 주전자, 접시, 찬합, 유리잔 등 당시로서는 귀한 일본 물건이 많았다. 아버지는 첩을 두었는데,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어린 박춘자는 그녀가 어머니의 친구인줄 알고 자랐을 만큼 그녀의 어머니는 작은댁과도 잘 지냈다. 작은댁은 아버지 실종 후 값비싼 물건을 처분하여 마련한 여비를 들고 아버지를 찾으러간다며 집을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송아당이 다섯 살 무렵 일본으로 떠난 아버지는 영영 무소식이다. 요즘처럼 전화나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라 풍랑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라 추측한다. 실종 십 년이 지난 후부터 생일날을 기일로 잡아 제사를 모셨다. 아버지의 실종 후 어머니는 집안의 물건을 하나씩 처분하여 생활하였다.

 

오빠 친구였던 이봉호는 키가 훤칠하고 인물이 좋았다. 그는 당시 대구시청 소속의 기계체조 선수였으며 스케이트도 잘 타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훗날 대한체육회 이사를 지냈고, 대한뉴스에도 나올 만큼 유명 인사였다. 팔남매의 막내아들이었던 이봉호와 결혼한 박춘자는 살림을 배운다는 구실로 시어머니와 같이 살았다. 결혼의 행복은 짧았다. 스물아홉 겨울에 친구 결혼식에 참석한 그는 수성못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아내와 세 살, 육개월의 어린 자식을 두고 한 마디 인사도 없이 그는 가버렸다.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일이 그녀에게 일어난 것이다. 지금도 그녀는 남편이 애틋하게 그립고 보고 싶단다. 그래도 결혼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경산 문천지에 남편 친구들과 낚시를 가서 놀았던 일이라고 한다. 박춘자에게 이봉호는 영원한 연인으로 남아있다.

 

그녀는 이봉호와의 사이에 일남일녀를 두었다. 아들은 계명대학교를 다니다가 중국북경대로 유학을 갔다.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아들은 모기관에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딸은 미대를 나와 박춘자가 유방암 투병을 할 때도 화랑 일을 도왔다. 딸도 서울에 송아당 화랑을 열고 운영하다가 지금은 쉬고 있다. 그녀는 아들을 남편처럼 의지하고 섬긴다. 곁에서 지켜본 그 아들은 지극한 효자다. 박춘자가 수필집 송아당의 사계(2014, 학이사)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하는 날, 아들과 며느리, 딸 내외, 손자손녀, 친정 오빠가 참석했다. 나는 아들을 보고 그녀의 남편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과연 송아당이 평생 연인으로 간직할 인물과 품격의 소유자였다. 딸도 미스코리아 출전을 권유받을 정도로 인물이 출중한 집안이었다. 재혼의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아들을 생각하면 재가할 수가 없었다. 여강이씨 시댁 문중에서 박춘자에게 효부상을 주겠다는 제안이 왔다. 그녀가 그런 상은 받을 수 없다며 사양하자 대신 문중 땅을 묘지로 하사받았다.

 

 

유방암이라는 시련을 극복하다

 

      ▲ 유방암 투병 중 가족들과의 동해안 여행
 

 

액자 속 여인이 깊은 수심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갈색톤을 바탕으로 한 그림의 분위기가 차분하면서도 신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김영대 화백이 그려준 송아당 박춘자의 자화상이다. 송아당은 이 자화상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오늘날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고 말한다. 봉산문화거리조성 준비위원장과 화랑협회 대구지회장이라는 무거운 감투를 쓰고 동분서주하다가 임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딸의 혼사까지 치르고 나서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이상 징후를 느꼈다. 심상치 않은 꿈도 꾸었다.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하니 유방암 삼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검사결과를 듣는 순간 그렇게 복잡하던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남의 이야기처럼 흘려듣고는 화랑으로 돌아와 업무를 보았다. 누구인들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태연할 수 있으랴. 훗날 화랑에 근무하던 직원의 말에 의하면 그날 말도 떨리고, 그림 잡는 손도 떨렸다고 한다. 가족에게는 당분간 비밀에 붙이기로 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아들네 딸네 식구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그동안 화랑일 한다고 가족여행 한번 못했으니 동해로 한 바퀴 돌아보자고 했다.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암이라는 형벌을 내린 신을 욕하며 마음껏 웃고 떠들었다. 한풀이를 하듯 온천도 하고 산채도 회도 제일 좋은 것만 먹었다. 아낌없이 돈을 썼다. 그림 구입할 비용 같은 것은 밀쳐두고 나와 가족을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호사를 누리고 싶었다. 겉으로 웃었지만 속으로는 울음을 삼켰다. 오랜만에 큰 소리로 웃기도 하고, 아들의 카메라 앞에서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암 선고를 받은 사람의 표정이 아니라 마냥 행복한 표정이다.

 

일상 업무를 보면서도 순간순간 놀라지 마세요. 종양이 꽤 큽니다.”라는 의상의 말이 자꾸만 재생되어 허공을 떠돌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환자가 병원을 찾지 않자 다급해진 의사가 화랑으로 전화를 해와 기족과 직원이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다. 그 사이 몸은 더 쇠약해지고 체력도 바닥이었다. 너무 큰 충격 앞에 닥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 잠시 판단 유보한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얼굴이 이상했다. 거울을 보니 한쪽 눈은 감기고 입이 돌아갔다. 설상가상으로 구안괘사(口眼?斜)가 온 것이다. 치료는커녕 아들 딸의 손에 이끌려 그대로 수술실로 직행했다. 수술 후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을 동안 반은 식물인간처럼 살았다. 친정어머니가 해주는 대로 먹고 의사가 시키는 대로 치료받았다. 슬픔도 걱정도 못 느낄 정도로 정신이 반 나갔다. 딸이 엄마, 제발 정신 차리라.”라는 울음 섞인 절규에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을 정도였다. 암은 극복했지만, 구안괘사를 제때 치료하지 못해 오래 고생을 했다. 지금도 후유증이 남아 그 후로 밝은 웃음을 잃어버렸다. 수술 전 옛 모습을 간직한 초상화를 보면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곱다.

 

평범한 여자의 삶을 꿈꾸던 그녀가 대구의 여성 화랑운영자 일호로 이름을 남겼으니 인생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남편과의 갑작스러운 사별로 그녀가 선택한 첫 직업은 꽃집운영이었다. 난생처음 장사라는 걸 하면서 세상살이의 쓴맛을 경험하던 그녀의 눈에 서예학원 간판이 들어왔다. 여덟 살이 된 딸의 손을 잡고 학원에 등록한 후 날마다 퇴근길에 들러 먹을 갈고 글씨를 썼다. 암울하고 답답하던 마음에 한줄기 빛이 비추었다. 1970년대 대구 동성로에는 고서화와 골동품을 거래하며 표구상을 겸하던 가게가 많았다. 서예학원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골동품 가게 몇 군데를 들러 구경도 하고 마음에 드는 작품은 구매했다. 차츰 안목도 생기고 작품의 가치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인연이 닿은 고서화로 송아당이란 간판을 걸고 그림 장사에 첫발을 내디뎠다. 아마도 그녀의 유전자에 내장된 예술에 대한 감각과 소질이 숨어 있다가 발현된 것이리라.

 

송아당 박춘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로 봉산문화거리조성 사업을 꼽았다. 화랑을 경영하면서 큰돈은 못 벌었지만, 문화 사업가로서 지역사회와 문화계에 작으나마 자신이 기여를 했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오랜 세월 여자 혼자의 몸으로 세파를 헤쳐 나왔지만, 기운이 온화하고 맑다. 그래서 내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이지만 나는 곧잘 그녀와 어울린다. 가끔 만나 밥도 먹고 차도 마신다. 좋은 경치가 있으면 구경도 간다. 나이와 시간차를 넘어 그녀와 나는 공감하고 소통한다. 이유는 무얼까. 반평생 그림 장사를 해왔지만 인간의 본성과 품위를 잃지 않은 그녀가 편안하고 좋다. 무엇보다 욕심이 없고 겸손하다. 어른대접을 받기보다 어머니처럼 푸근한 어른이다. 내가 가끔 그녀의 집에 들르면 무엇이라도 주고 싶어 안달이다. 좋은 공연이 있으면 같이 가자고 전화가 온다. 욕심 없이 분수껏 일생을 살아온 사람만이 뿜어내는 기품 같은 것을 송아당에게 느낀다. 송아당 현판의 코발트색처럼 그녀의 삶도 깊고 그윽하게 무르익어 간다.















 

-------------------------------------------------------------------------------------------------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댓글

스팸방지코드
 [새로고침]
※ 상자 안에 있는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0/200
<a href="/black.html">배너클릭체크 노프레임</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