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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19-12-11 오후 4:36:00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박민재
[이경희의 소가 외다리 건너는 이야기]

기사입력 2019-03-05 오후 2:54:36

▲ 박민재  어머니, 종부, 시인. 교리교사



1. 교사가 꿈이었던 삼천포 아가씨

 

박민재 부부를 만나러 가는 날, 함박눈이 펄펄 내렸다. 몇 번의 섭외 끝에 어렵게 만남이 성사되었다. 환상동의 소박한 식당에서 마주한 부부는 진중하지만 다정스러웠다. 작년 가을에 병고를 치른 아내를 배려하는 남편의 깊은 마음이 느껴졌다. 경주 최씨 관가정공파 하양문중 16대 종손의 아내로서, 삼 남매의 어머니로서 살아온 박민재 여사. 일흔하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빨간색 모자가 잘 어울리는 멋쟁이다. 첫날은 하양 최씨 문중의 역사와 문중이 배출한 인물의 이야기를 주로 들었다. 이 문중은 경산 일대에서 손꼽히는 가문으로서, 전 서울대 총장을 지낸 최문환 박사가 대표적 인물이다. 후손들이 주로 학계에 많이 진출해 있다고 한다.

 

박민재는 1947년 경남 사천시(, 삼천포)에서 밀양박씨 아당파 종가집에서 칠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이 사천시 공무원을 지냈고, 여든 마지기의 농사를 짓는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천도교를 모태신앙으로 태어났다. 당시 남해 일대에서 세를 키운 천도교는 일제 강점기에 농촌계몽운동과 개화에 앞장선다. 남녀평등, 어린이 존중, 계급타파 등의 교리는 훗날 박민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녀의 부친은 공직생활을 했으며, 청렴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해방 후 행정 공백기에 상당한 부를 축적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천도교 교도였던 부친은 유연한 원칙주의자였다. 당신은 천도교도였지만 삼촌들이 유교식 제사를 지내도록 배려했다. 박민재는 그런 아버지를 빼닮았다.

 

그녀는 여학교를 졸업한 후 삼천포 시청에 취업한다. 시장 부속실에 근무했는데, 창밖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스포츠를 좋아했다. 시청에 들어가 스물셋에 테니스 라켓을 처음 잡았다. 운동 신경을 타고났는지 도민체전에서 우승까지 했다. 등산도 즐겼다. 독도법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북한산에서 암벽타기도 할 만큼 활동적이었다. 그러던 중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 둘째 올케가 젊은 나이에 병환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남겨진 조카 둘과 연로하신 부모님 돌보는 일이 그녀의 몫으로 남겨졌다. 친정어머니는 엄마 없는 조카들 키워주면 니가 언젠가는 복 받을 끼다.”라며 딸을 위로해 주었다. 그런 어머니가 막내딸의 결혼식을 못보고 선을 본 후 한 달 후 돌아가셨다.

 

▲ 육군3사관학교 한 후보생이 보낸 편지
 

 

젊은 시절의 꿈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교사가 꿈이었지. 그래서 조카들과 동네 아이들 모아 유희도 가르치고, 홑이불로 무대의 막처럼 만들어 같이 놀았지.”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은 씨앗은 언젠가 싹을 틔우기 마련이다. 박 여사의 이런 꿈은 훗날 성당 교리교사로, 영천 3사관학교 교리교사로 꽃 피운다. 2000년도부터 일요일마다 영천의 사관학교에 교리교사 봉사활동을 나갔다. 그때 만난 사관생도의 결혼식에 여덟 번이나 주례도 섰다. 주례사를 할 때 신혼부부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는지 물었다. “결혼은 서로가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것이다. 상대가 거슬리거나 아쉬운 것은 나를 보고 반성하라. 나를 통해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삶이 사랑으로 이루어질 때 완성된다.” 그래서인지 종손 최재명 선생과 종부 박민재 여사의 부부애가 남다르게 보였다.

 

안방에 들어간 그녀는 예쁘게 접은 편지 하나를 가져와 보여주었다. “한주마다 정성껏 저희를 위해 힘들게 음식을 장만해주시는 수고로움에 대해 정말 감사드립니다. () 그동안 저희에게 주신 그 정성, 큰마음을 가득 담아 가져가겠습니다. 그리고 받은 만큼 야전이나 어디에서든 베풀도록 하겠습니다.” 교리 강의를 하러갈 때마다 박민재는 생도들의 간식을 챙겨갔다. 떡을 맞추고 감주를 해서 학생들에게 먹였다. “생도들이 배가 고프니 과자나 탄산음료를 사서 먹더라고. 우리 애들 키울 때 아무리 집안일이 바빠도 직접 간식을 장만해서 주었거든. 그 아이들도 다 귀한 자식들이라 떡도 해가고 감주도 해갔지.” 이런 어머니 같은 마음이 생도들을 감동시켰으리라. “일요일 성당에 가면 훈련에 지친 저희들 걱정해 주시고, 편하게 배려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편지를 읽는 나도 가슴이 따스해졌다.

 

2. 운명처럼 종부가 되다

 

긴 생머리에 화장도 안한 맨얼굴로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선을 보러 가는 아가씨가 맨얼굴이라니 용기가 대단하다. 화장하고 꾸미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큰시누가 중매를 주선했다. 삼천포 바닷가 작은 다방에서 신랑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일부러 뒷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면으로 앉은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첫 인상이 좋았다. 특히 차분하고 힘 있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일사천리로 혼담이 진행되었다. 십일월에 만나 한 달 후 약혼식을 하고, 이듬해 사월에 결혼식을 했다. 박씨 종가에서 최씨 종가로 시집을 왔다. 종가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종부의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알았을 텐데 어떻게 종부의 자리에 시집올 생각을 했을까?

 

종가로 시집을 간다니 언니들이 말렸다. 타고난 운명인지 종가 맏며느리 자리가 무섭지 않았다. 친정집에는 제사가 끊이질 않았고, 늘 손님이 많았다.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오는 것 당연하다고 여기며 자랐다. 손님이 오면 그냥 보내지 말고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며 보내라는 교육을 받았다. 걸인이 와도 손님이라 여기고 밥상을 차려 잘 대접했다. 그래서인지 종부의 자리가 두렵거나 싫지 않았다. 지금까지 종부로서 살아온 삶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종부란 하늘이 내린다고 했던가. 내가 상상하는 종부의 모습은 한복차림에 손에 물 마를 날 없는 고된 자리다. 박민재 여사는 양장과 모자가 잘 어울리는 우아하고 품위 있는 현대여성이다. 어쨌든 종부의 변신은 무죄다.

 

시집을 오니 연중 제사가 열한 번이었다. 어떤 달은 한 달에 두 번씩 제사가 들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봉제사 받드는 일을 흔쾌히 여겼다. 제사 받드는 일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나도 힘들지 않다. 조상 받드는 제사는 정성이 중요하지.”라고 대답한다. 종부의 임무 중 제사와 접빈이 으뜸이거늘, 집안에는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아이들 친구가 와도 정성껏 밥상을 차려주었다. 하루는 걸인 가족이 제삿날 찾아왔단다. 수세뭉치 같은 걸인 애들 머리도 손수 감겨주고 상을 차려주었다. 내가 종가를 방문한 날, 꽃으로 탁자를 장식하고 곶감과 토마토 다식을 내놓았다. 고구마도 미리 구워 놓았다 올 때 사주셨다.

 

시어른이 기거하는 사랑채는 동네 카페였다. 농한기에는 해만 뜨면 동네 어르신들이 사랑방에 모여들었다. 일회용 커피가 처음 나왔을 무렵,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커피를 타서 사랑채로 날랐다. 한 달에 마시는 커피의 량이 엄청났다. 종부는 불평 한 마디 없이 손님대접을 했다. 오죽했으면 동네 마트에서 다방하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명절날 들어온 정종을 커피로 바꾸기도 했다. 시어른은 며느리 칭찬을 면전에서는 하지 않았지만, 집안 어른들에게 넌지시 며느리 칭찬을 하셨다. 시부모님 두 어른은 아들 며느리의 효도를 받으시며 여든여섯까지 건강하게 살다 가셨다. 박민재는 환갑이 되어서야 시어른 모시는 일에서 벗어났다.

 

▲ 외손녀 돌 때 가족사진
 

 

결혼을 하고 남편이 월급봉투를 아내에게 주었다. 결혼했다고 아내가 가정 경제를 움켜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며느리는 월급봉투를 시어른께 그대로 갖다 드렸다. 시아버님이 남편에게 다시 맡겼다. 오늘날까지 가정 경제 관리는 남편이 한다. 사교육이 기승을 부릴 때도 자녀교육을 학원에 맡기기보다 직접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올바른 학습태도를 가지면 스스로 공부한다는 지론이었다. 다행히 자녀들도 잘 따라주었다. 장남은 미국 유학 후 박사학위를 따서 한수원 연구원으로 근무 중이고, 딸은 학원을 경영하다 결혼을 했고, 막내아들은 로스쿨에서 변호사 공부 중이다.

 

종부로 살아오면서 어찌 시어머니와 갈등이 없었으랴. 낭만주의자 며느리가 마당에 장미를 심으면, 실용주의자 시어머니는 꽃을 뽑아내고 부추를 심으셨다. 이렇게 한번씩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어긋났다. 한번은 시어머니가 못마땅한 일이 있었든지 냉전 모드로 돌아섰다. 밥도 안 드시고 며느리를 나무라지도 않고 그저 침묵시위를 하셨다. 말씀이라도 하시면 사과하고 화해할 텐데, 며느리는 속이 타들어갔다. 시장에 가서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명태를 사왔다. 정성스럽게 국을 끓여 밥상을 차려드리니 그제야 마음을 풀고 평상심으로 돌아오셨다. 속상하거나 힘들 때는 하느님이 내 마음 알아주시겠거니, 하면서 참았다. 종부의 자리가 어디 만만한 자리인가. 그래서 종부란 하늘이 내린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3. 종부, 시인으로 등단하다

 

1994년 쉰둘의 나이에 박민재 여사는 시인으로 등단한다. 결혼 전에 방송통신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공부를 했다. 지도교수가 서울대 국문학과 출신이었는데, 출석수업 때 연구실에 가면 책도 주시고 밥도 사주셨다. 그 교수님은 늘 그녀에게 글을 써보라고 권유했다. 그 말이 가슴에 남아 있었다. 혼자서 시를 읽고 따라 써보았다. 쉰셋에 다시 방통대 국문학과에 편입한다. 결혼 후에도 틈만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대구역 앞에 있던 대구서적이 단골 서점이었다. 어떤 날은 도시락을 사가서 종일토록 책을 읽었다. 그녀를 눈여겨 본 주인 내외가 책을 빌려줄 테니 깨끗하게 읽고 가져오라며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행여 손자국이 남을까봐 조심조심 읽고 돌려주곤 했었다.

 

박민재는 청년기부터 독자로서 늘 문학의 주변부를 맴돌았다. 어느 해, 고교생 시화전 뒤풀이 자리에서 박재삼 시인을 만났다. 삼천포 봄 바다를 환한 꽃밭 같다고 노래한 박 시인은 술을 좋아했지만 점잖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결혼 후 해변시인학교가 열리는 칠포해수욕장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당시 중학교 일학년이던 큰아들과 함께 소설가 박경리 선생을 보려고 무대 근처로 갔다. 홍완기 시인이 모자(母子)를 발견하고 가까이 오라고 해서 가서 인사를 드렸다. 윤동주와 김소월의 시를 좋아하며, 습작 노트도 있다고 말씀을 드렸다. 시인들의 시낭송과 노래 공연을 구경하고, 문학에 대한 갈증을 해소했다. 습작노트에서 네 편의 시를 골라 1994년에 해동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독학으로 시인이 된 셈이다.

 

나는 박경리 선생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의 대하소설 토지전권을 완독했지만 한 번도 작가를 본 적이 없다. “박경리 선생님께 집에서 가져간 토마토를 몇 개 갖다드렸지. 아마 그때가 유방암 투병 중이셨던가 봐. 장거리 여행에 피로가 겹쳤는지 기운이 없어 보였어. 내가 집에서 직접 키운 토마토라며 드리니 고맙다고 하시대. 엄마처럼 푸근한 인상이었어.” 살아생전 박경리 선생을 뵙지 못한 나는 이야기만 들어도 좋았다. 경산문협의 회원인 박민재 시인은 국제펜클럽회원, 공간시인협회, 해동문협, 산문과시학, 빛그림 회원으로 활동한다. 올해 안으로 시 작품을 정리하여 시집을 발간할 예정이란다. 독서와 시작이 일상인 종부의 모습이 참으로 멋지다.

 

▲ 경산문협 후배들과~
 

 

박민재 시인은 경산문협의 대선배시다. 모임에 나오면 늘 조용히 앉아 계시다가 가셨다. 말씀도 거의 안 하신다. 그래서 나와는 개인적 교류가 거의 없없다. 최씨 문중의 종부라는 사실만으로도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삼일절날 마지막 인터뷰를 하고 문협의 김정아 시인과 셋이서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인간적으로 한결 가까워진 우리는 진작 이렇게 어울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경산문협에서 활동을 하면서도 한발 가까이 다가갈 기회가 없었던 탓이다. 그녀의 살아온 이야기는 한 집안의 역사이면서 소설보다 흥미로운 인간의 이야기였다. 팔공산 자락의 자두꽃이 피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4. 종부와 시인의 조화로운 삶

 

큰아들이 교제하는 아가씨가 있는데, 결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최씨 문중을 책임질 종부를 맞이하는 일은 그녀에게 어떤 일보다 큰일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박민재 여사는 구일기도를 시작했다. 혹여 며느리감이 마음에 안 들거나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사랑하게 해달라고 그녀의 하느님께 매달렸다. 집으로 들어선 예비 며느리는 단아한 옷차림으로 반절을 했다. 얼굴이 생강꽃처럼 작고 예뻤다. 마음이 놓였다. 몸이 약한 것이 마음에 걸려 약혼식을 앞두고 한약을 지어 보냈다. 자신의 자리를 이어갈 며느리 사랑이 극진하다. 한약 덕분인지 며느리는 건강한 손자 둘을 품에 안겨주었다.

 

사랑하는 어머니께

먼저 어머니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살아온 과거를 회상했을 때 보통 사람들은 후회를 많이 한다고 하죠. 하지만, 제가 늘 지켜본 어머니의 모습은 지난 일에 대하여 웃으며 회상하시는 분이지요. 한결같이 곧은 마음과 행동이 이룬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요.

매사에 노력하시고 즐기시고 긍정적으로 살아가시는 어머니! 늘 보고 듣고 공감하며 어머니를 닮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의 윗사람으로서 같은 여성으로서 존경합니다. 지금은 아직 어머니의 그늘에 있지만 훗날 어머니의 우산도 되어드리리라 감히 생각합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저희 곁에 있어주세요. (이하 생략)

- 2013914일 며느리 미영 올림

 

 

며느리가 시어머니 박민재 여사 생일 때 쓴 축하편지다. 며느리에게 존경을 받는 시어머니라니, 이 하나만으로도 박민재 여사의 삶은 성공이다. 그렇다. 대부분 종부의 삶은 한()이 많다. 자신을 희생하여 봉제사와 접빈으로 일생을 살아간다. 종가라는 유산을 유지하려면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바탕이 되어야 하니까. 다행스럽게도 박민재 종부는 자신의 삶도 지키면서 종부로서의 역할도 훌륭히 해냈다. 그녀가 극진히 섬기는 하느님 덕분인지 주어진 책무를 무사히 수행했다. 종부와 시인, 참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이다. 종부가 자아를 희생하는 자리라면, 시인은 자아를 거두는 자리다. 그녀는 종부와 시인으로 조화롭게 잘 살고 있다.

 

▲ 막내 아들과의 행복...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종부로서 삶을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은 어떤 것인지. “어른들 모시고 살면서 자녀들의 인성 교육이 저절로 되어 아이들이 잘 자라준 것이지.” 제사를 모시고 설거지까지 마치면 새벽 네 시가 가까웠다. 두어 시간 쪽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상을 준비해야 하는 나날도 많았다. 힘들다는 생각보다 당연히 하는 일이라 여기며 살았다. 후회는 없다. 층층시하 어른 모시고, 달마다 드는 제사에 삼남매에 조카까지 거둔 세월, 어찌 갈등과 풍파가 없었으랴. 엉킨 실타래 같은 복잡한 일도 하나하나 정성으로 풀면서 가정의 평화를 만들고 지켜왔다고 고백한다. 인간을 지극히 아끼고 섬기는 인간애가 그녀의 깊은 신앙심과 만나 가족의 울타리를 넘나들며 꽃을 피웠다.

 

박민재의 삶을 취재하면서 나는 그녀가 수행한 여러 역할 가운데 종부로서의 삶에 주목하고 싶었다. 인터뷰를 진행할수록 무게중심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 세대치고는 여성으로서 자의식도 강하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었다. 의외였다. 기실 종부란 가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그녀의 내면에 자리한 상반되는 기질을 지혜롭게 다스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얼까. 공부와 신앙이었다. 덕분에 종부로서의 책무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요즘도 그녀는 매일 성경 통독을 한단다. 이런 공부하는 태도가 종부로서의 삶과 품위를 유지한 원동력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의 자리와 몫이 있다. 종부의 자리는 여느 주부의 자리와는 다르다. 종부에 의해 한 가문의 흥망성쇠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종가에서 종부의 자리란 무겁고도 엄중하다. 제사와 접빈, 교육 등 종부의 역할이 크다. 무엇보다 포용하고 보듬는 너른 품과 덕이 필요한 자리다. 박민재 여사의 삶을 통해 나는 종부로서 살아온 한 여성의 생을 기록하고 싶었다. 희생과 헌신을 떠올렸던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종손 최재명 선생도 합리적이고 자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무엇보다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고 배려했다. 그녀는 늘 공부하고 기도하며 자신을 다잡았기에 오늘의 가정을 이루었다고 회고했다. 시를 쓰고 책을 읽는 종부,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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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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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 동춘
    2019-05-31 삭제

    삼천포 남양중학교퇴직 교장 박 형춘씨가아당공파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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