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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19-08-17 오전 8:43:00

질경이 같은 여자, 송정순
[이경희의 소가 외다리 건너는 이야기]

기사입력 2018-12-10 오전 10:00:59

질경이라는 풀이 있다. 짓밟혀도 되살아난다고 하여 질긴 목숨이라는 뜻에서 질경이라 부른다. 동네 공터나 골목길, 강둑 등에서 흔하게 보던 풀이다. 질경이는 사람이 밟거나 바퀴가 지나가도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잠시 엎드렸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일어선다. 송정순, 일흔아홉 그녀의 삶은 질경이처럼 끈질긴 생명력과 인내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고생도 많이 하고 심장병 수술도 했다는데 걸음걸이도 씩씩하고 언변도 뛰어나다.

 

▲ 송정순
 

 

두 번째 인터뷰를 마칠 무렵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선생님, 제 인생 이야기를 다 들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꽃다발이라도 안겨주고 싶었다. 정말 수고하셨다고. 한 세월 여자로서 주어진 생을 열심히 살아온 그녀의 삶이야말로 이 시대 여상사가 아니겠는가. 도망가고 싶었던 순간이 어찌 없었으랴. 삼 남매를 생각하며 모진 세월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미안한 듯 내미는 수제 모과차를 소중히 받아 안고서 인사를 나누었다.

 

 

교장실로 찾아간 똑순이

 


 

송정순은 1940년 거창군 신원면 청수리(청수태)에서 태어났다. 이남오녀 중 둘째 딸이다. 거창 사람들이 청수태라 부르는 그곳은 높은 산 하나를 넘어야 학교에 갈 수 있는 첩첩산골이었다. 한국전쟁 직전에 거창읍내로 이사를 나왔다. 그녀는 열 살에 거창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시인 신달자가 초등학교 동기다. 또래보다 두어 살 나이도 많고 영특했던 송정순은 공부를 잘 했다. 그랬더니 친구들이 니는 나이가 들어서 이근(시근)이 빨리 들어 공부를 잘 하나?”라며 질투 어린 말을 했다.

집에 오면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해야 했지만, 학교 생활은 즐거웠다. 학교 생활에 재미를 붙일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열 식구가 솥단지와 이불 보따리를 이고 거창향교 동네로 피난을 갔다. 식구들이 숨을 방공호를 집집마다 파야하는데, 파다 보면 옆집 굴과 마주치기도 했다. 피난 가는 길에 배가 고팠던 동생들이 수박이나 참외를 보고는 따먹자고 울고불고했다. 전쟁 중이지만 함부로 남의 밭 과일을 손 댈 수는 없었다고 한다.

 

1951년에 일어난 신원면 양민학살 사건을 아느냐고 물었다. “정월초하룻날 제사 지내려고 아침에 떡국 끓이는데 군인들이 와가지고 마을 사람들 다 불러냈어요. 길에 난 소 발자국을 보고 마을 사람이 빨치산과 내통했다고 생각한거라. 우리 고모가 그 동네에 살았는데 군인이나 경찰 가족 줄에 서서 안 죽고 살았어요. 열 집만 살고 마을 사람들 그날 다 총살당했어요. 나중에 연수사라는 절 입구에 위령비를 세웠어요.”

 

전쟁이 끝나고 학교도 집도 다 불에 타서 파괴되었다. 운동장 나무 아래서 공부를 하다가 냇가에 가서 치마에 돌을 주워 날랐다. 아이들도 학교를 짓고 집을 짓는데 힘을 보태야 했다. 송정순의 집도 폭격을 맞아 흔적만 남았다. 아버지가 월사금 낼 돈이 없으니 나락 지으마 후 내년에 학교 보내 줄기니 집도 지어야 하고 동생들 돌봐라.”고 했다. 학교 보내 달라고 떼를 써보았지만 아버지의 태도는 완고했다.

 

송정순은 교장실로 찾아갔다. 집안 사정상 월사금을 못 내는데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을 다 들은 교장선생님이 다음에 월사금 내도되니 학교에 다녀라. 너처럼 똑똑한 아이가 집에서 놀면 안 된다.”라며 흔쾌히 청을 들어주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도 학교에 가라고 허락해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전쟁 직후라 폐허와 궁핍의 시대였다. 송정순은 스스로 길을 찾아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언니는 사학년을 다니고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 사건은 송정순의 타고난 기질을 잘 보여준다. 겨우 열 살짜리 아이가 교장실로 찾아가 공부 하고 싶다며 도와달라는 청을 넣었다. 당차고 적극적인 성격이다. 만약 그녀가 공부를 계속 했더라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될 수도 있었겠다. 초등학교 교육이 전부지만, 송정순의 언어는 야무지고 논리적이었다. 자존감도 높은 편이다. 어떤 질문에도 에두르지 않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무엇보다 힘들게 살아온 자신의 생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어머니로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당당했다.

 

고난의 시작, 시집살이

 

이웃 동네인 월천리에 총각이 하나 있는데 인물이 좋다는 소문이 났다. 동네마다 보따리를 이고 다니는 장사꾼 아지매가 중매를 했다. 당대 최고의 배우 신성일 뺨칠 정도로 신랑 인물이 빼어났다. 송정순의 나이 스물셋, 당시로는 만혼이었다. 딴에는 고르고 골라서 간 시집이건만 홀시아버지에 켜켜이 쌓인 가난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기세 많이 나온다고 두 방 사이에 전구 하나로 불을 밝히던 시절이었다. 시아버지가 얼마나 봉창(작은 창)을 크게 냈는지 곤란한 때도 많았다. 양식이 귀해 호박잎을 치대어 보리쌀 넣고 죽을 끓여 하루 양식을 한 적도 있었다.

 

산골에서 살다가는 자식들 공부도 못 시키겠다 싶어 대구로 이사를 했다. 반야월 송정리였다. 남의 집 방 한 칸을 얻어 도시민의 삶을 시작했다. “집 없는 설움 말도 마이소. 집 주인이 전기세 영수증 보여주지도 않고 두 집 전기세를 다 우리보고 내라카고. 그래도 말 한 마디 못하고 살았어요.” 대구에 와서 남편은 친척의 주선으로 직장을 들어가면 한 달을 못 다니고 그만두었다. 아이들은 성장하여 먹이고 공부도 시켜야 하는데 남편은 뿌리 뽑힌 나무처럼 도시 생활에 정착을 못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생계는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이후에도 송정순은 남편을 대신하여 평생 가장 역할을 한다.

 

일찍 대구로 나와 교동에서 큰 여관을 운영하던 친정 삼촌이 양장기술을 배우라고 권했다. 양장점보다 미용실이 나을 것 같아 그녀는 미용학원을 갔다. 서른다섯부터 십 년간 미용실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 그러다가 이불 가게를 하는 친정 사촌동생의 권유로 이불 장사를 시작했다. 동네마다 다니면서 새 이불을 팔기도 하고, 옛날 솜이불을 가져와 솜을 타서 새로 만들어 갖다 주는 일을 했다. 무거운 이불을 머리에 이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장사는 그런대로 되었다. 멀리 거제도까지 장사를 하러가기도 했다. 한번은 장사를 하고 집에 오니 한밤중이었다. 밤늦게 왔다며 남편이 불같이 화를 내고 난리가 났다. 며느리가 시어머니 편을 들어주어 겨우 진화했다.

 

심장 수술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어느 날, 잠을 자다가 가슴이 찢어지는 통증에 잠을 깼다. 심장이 옥죄어왔다. 급히 119를 불러 경산의 경상병원 응급실로 갔다. 의사가 빨리 영대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바로 수술실로 들어가 심장 수술을 했다. 그런데 마취가 안 풀려 구 일 만에 깨어났다. 자식들도 포기할 무렵 깨어난 것이다. 주치의도 기적이라 했다. 범물동에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대출금 이자가 부담스러워 집을 팔고 경산 사동으로 이사를 왔다. 아파트를 팔고 나니 집값이 서너 배가량 뛰었다. 속이 상해서 잠이 안 왔다. 스트레스를 받아 심장에 무리가 가서 심근경색이 온 것이다. 그동안 쌓인 삶의 무게가 심장을 압박했는지도 모른다. 죽을 운명은 아니었는지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심장 수술을 하고 이십여 일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산까지 이불을 배달을 하러 갔는데 계단을 오르는데 숨이 가빴다. 한 계단 오르고 쉬고, 또 한 계단 오르고 나서 쉬고 하면서 오층 집까지 물건을 갖다 주었다. 자식들 밥을 굶길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가 쉰아홉이었다. 지금도 정기 검진을 받으러 매달 병원을 간다. 고혈압 약과 심장 약을 먹지만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수술 후, 새벽에 집 앞의 공원에 나가 두 시간씩 운동을 한다. 겉모습은 전혀 환자 같지 않다. 씩씩하고 활달하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 병도 뛰어넘게 했으리라. 요즘도 그녀는 소형차를 몰고 노래교실과 민요교실로 뛰어다닌다.

 

경산으로 이사를 오니 버스 배차 간격이 멀어 어딜 가기가 불편했다. 예순셋에 운전 면허증 따기에 도전한다. 필기는 세 번 만에 합격하고, 도로 주행은 단 번에 합격했다. 아들 친구가 타던 프라이드 승용차를 얻어 운전대를 잡았다. “새벽에 온천 목욕 갔다 오면서 차 안에 음악 크게 틀어놓고 집으로 오는 길이 행복해요. 소형차이지만 외제 차 부럽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송정순은 일상에서 행복을 찾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심장 수술을 하고 나니 내 인생 평생 고생만 하다 죽을 수는 없다. 나도 즐겁게 한번 살아야겠다.”라는 자각이 들었다. 인생관이 바뀐 것이다.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노래나 실컷 해보고 싶었다. 동부동주민센터를 찾아가 민요교실, 노래교실에 등록을 한다.

 

짜증은 내어서 무엇하나

 


 

짜증은 내여서 무엇하나 성화는 받히여 무엇하나

속상한 일도 하도 많으니 놀기도 하면서 살아가세

니나노~~ 뉠리야 닐리리야 니나노~~ 얼사 좋아 얼시구 좋다

벌 나비는 이리저리 펄펄 꽃을 찾아서 날아든다

민요 태평가일절

 

태평가한 가락 뽑으면 근심걱정도 사라지고 속이 후련해진다. 송정순은 동부동주민센터 민요반 십 년 차, 풍물반 팔 년 차 학생이다. 양 모임에서 회장을 맡고 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코미디와 노래를 좋아했다. 그녀의 부친도 신명이 좋은 사람으로 꽹과리를 잘 치고 마을 풍물패의 앞잡이였다. 예전 거창에서 대구를 오가는 버스에서 네 시간 동안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다. 이미자, 나훈아, 윤수일 노래를 부르면 버스 안 손님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말하자면 무료 자선공연을 한 셈이다. 신곡도 산에 올라가 걸으면서 두어 번 들으면 가사와 곡을 다 외운다.

 

한복을 곱게 입은 사진을 한 장을 보여준다. 회색 치마에 남색 저고리를 입고 5회 경산시 평생학습 재능나눔 박람회무대에서 공연하는 사진이다. 예쁘게 화장을 하고 한복을 입은 모습이 낯설 정도로 당당하다. 무대에서 민요를 부르고 장구를 치면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지난 세월 고생한 것도 다 잊어버린다. “민요교실, 가요교실 가는 날은 아침부터 설레고 콧노래가 절로 나와요.” 병원 주치의도 송정순 할머니는 즐겁게 사셔서 건강을 되찾으셨어요.”라고 할 정도로 노래는 그녀에게 생명수와도 같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노래 한 곡 부르고 나면 가슴이 시원해진다.

 

화요일은 동부동사무소 민요교실, 목요일 오전은 시민회관 노래교실, 오후는 동부동사무소 풍물교실, 토요일은 시립박물관 노래교실에 출근하여 신명나게 노래를 부른다. 민요반에서 요양병원에 봉사활동도 갔다. 몸이 아파 병원에 있는 노인들을 보면 건강하여 노래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토요일 시립박물관 노래교실에서도 그녀의 인기는 늘 상종가다. 이종수 강사가 만능 재주꾼, 우리 송 여사님을 무대로 모시겠습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면 힘이 솟는다. 공연할 때 쓰는 소품 가발이 다섯 개나 있을 정도다. 무대에 올라 노래하고, 가발을 쓰고 춤을 추면 자신도 신나고 무대 아래 사람도 좋아하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말이다.


 

여자의 일생은 훌륭하다

 


 

 

인생이 물레방아 같아요. 물을 맞는 데는 급하게 넘어가고, 물이 없는 데는 느리게 넘어가잖아요.” 젊었을 때는 고생이 끝도 없다 싶었는데, 노년에 노래로 행복을 찾았다. 젊은 시절 배운 미용기술로 이발 봉사도 한다. 팔 년째 누워 지내는 이웃 할머니와 점촌리에 사는 할머니를 찾아가 머리 손질을 해준다. 남편은 평생 이발소 한번 안 가고 전용이발사인 송정순 여사에게 머리를 깎는다. 인물은 좋으나 무능한 남편을 원망도 많이 했다. “요즘 시대 같으면 이혼을 열 번 하고도 남았지요. 잘 참고 살았다가 아니고, 능력 없는 아버지 옆에서 애들이 어떻게 자랄까 걱정돼서 도망도 못 가고 살았지.” 이런 자의식을 가졌기에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았으리라.

 

살다보니 엄마가 고생한 것 착한 자식들이 알아주고 노래로 마음을 치유하면서 행복한 노년을 보낸다. 어느 해 명절 날, 삼 남매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엄마라서 도망 안 가고 아버지와 평생 살았어요. 이제 밥상 차려놓고 나가면 혼자서도 밥 데워 드시고 하세요. 죽을 사람 다시 살아온 엄마이니 남은 인생은 좀 편안하게 해주세요.” 영감도 나이가 드니 자식들 말을 듣고 수긍을 한다. 요즘은 일식이(한 끼만 집에서 먹는 남자)가 되었다. “내 복이 여기까지인데 다른 남자 만난들 얼마나 더 호강하며 살겠노 싶어 참고 살다보니 자식들과 시동생이 내 고생한 것 다 알아주대요.”

 

송정순 할머니를 인터뷰하고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에서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 흐른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송정순이 살아온 인생을 글로 담아내고자 했던 내 욕심은 무참히 무너졌다. 이 노래만큼 그녀의 인생을 대변하는 것이 또 있으랴. 다행스러운 것은 송정순은 눈물 대신 노래로 인생 전환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노래는 종교적 신앙에 가깝다. 슬픔과 고난과 아픔을 담아내고, 가슴 속 이야기를 토로하는 고백의 장이다. 나아가 공감과 치유의 역할까지 한다. 가슴 속 쌓인 한()을 노래 한 자락에 흘러 보내니 얼마나 다행인가.

 

젊었을 때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공부가 제일 하고 싶어요, 야간 중학교라도 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공부 많이 했으면 변호사가 되어 억울한 여자들 위해 일했을 거예요.” 시절을 잘못 만나 그녀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지금 송정순은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생각하며 욕심을 줄이면 삶이 행복하단다. 송정순의 행복론이다. 여든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무엇을 바라겠는가. 노래교실에 가서 신명나게 놀고, 민요교실에 가서 마음 속 한을 풀어내며 즐겁게 살아가는데. 질경이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송정순 할머니와 그의 친구들에게 훈장이라도 수여하고 싶다. 가난도 고생도 그녀들의 잘못은 아니기에.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세대는 성장기에 해방과 전쟁, 가난을 겪는다. 교육이나 기술도 없이 온몸으로 세월을 살아온다. 가부장제의 마지막 희생 세대인 송정순의 인생 이야기는 어쩌면 동시대 여성의 보편적 삶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딸들은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연대기가 놓친 한 여성의 역사를 이 글은 증언한다. 문득 시인 문정희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돌마다 태양의 얼굴을 새겨놓고/ 햇살에도 피가 도는 마야의 여자가 되어/ 검은 머리 길게 땋아 내리고/ 생긴 대로 끝없이 아이를 낳아볼까”(머리 감는 여자중에서) 송정순은 자식의 얼굴을 돌에다 새겨놓고 마야의 여자처럼 출렁이는 생명력으로 생을 살았다. 그녀의 희생과 헌신 위에서 가족은 이어지고 역사도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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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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