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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19-11-18 오후 4:54:00

고향 박사리를 사랑하는 남자, 박기옥
[이경희의 소가 외다리 건너는 이야기]

기사입력 2018-07-11 오전 9:14:21

늑대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자란 아이

 

                                  ▲ 박기옥
 

 

팔공산 갓바위로 향하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꽤 너른 들이 보인다. 왼쪽으로는 무학산이 학의 나래를 펼친 듯 앉아있다. 들 한가운데 작은 초등학교가 있고, 교회를 중심으로 민가가 자리 잡은 마을, 박사리(博沙里). 팔공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 실어온 화강암 알갱이가 넓게 퍼진 동네라 이름이 박사리다. 마을 뒤로는 박사천이 흐르고, 구만들이 평야지대를 이룬다. 지금이야 사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있고, 경산에서 사십여 분이면 갈 수 있지만, 본래 박사리는 산골마을이었다. 박기옥은 박사리에서 나고 자란 와촌 토박이다. 서른한 살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대구로 나가 살다가 예순에 다시 고향 본가로 돌아왔다. 소년은 새벽마다 동네 우물가에 내려와 우는 늑대 울음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날만 새면 동무들과 팔공산 자락을 누볐고, 불굴사는 초등학교 시절 단골 소풍지였다. 골짜기마다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농경시대에 유년기를 보낸 이라면 누군들 고향이 그립지 않으랴. 박기옥에게 고향 박사리는 그리운 고향그 이상이다. 대대로 조상이 살아온 곳이고, 자신이 졸업한 모교가 남아있고, 다시 본가로 돌아와 여생을 살고 있으니, 그에게 박사리는 인생 그 자체이다. 한번은 팔공산 자락의 문화유적지를 답사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어린 아이들과 학부모가 탄 버스가 갓바위 주자장까지 들어갈 수 없다며 초소에서 막았다. 오백여 미터 가파른 길을 걸어가라는 초소 경비원의 태도는 완고했다. 다급해진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비원이 그와 통화를 길게 하더니 버스를 통과시켜 주었다. 그가 무슨 말로 설득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와촌 팔공산 자락에서 박기옥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명인사다.

 

세간에서 얻은 그의 명성은 본토박이라는 이유만은 아닌 듯싶다. 선공후사(先公後私), 그를 설명하는 여러 별칭 중에 가장 적합한 사자성어다. 사사로운 이익보다 명분과 공익을 우선시 하는 그는 요즘 보기 드문 인간형이다. 그는 자신보다 고향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모교인 대동초등학교 총동창회장, 장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박사사건 희생자 명예회복운동, 경산문인협회 회장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현대인 대부분이 산업화로 고향이 사라졌거나, 타향살이에 지쳐 돌아가고 싶어도 꿈에 그리던 고향은 없다. 그런데 박기옥은 온전히 보존된 고향으로 돌아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으니 복 받은 사람이 아닌가.

 

박기옥의 조부는 선비로서 한약방을 했다. 자손이 귀한 집에서 위로 딸 셋을 낳은 뒤에 귀한 손자가 태어났으니, 조부의 손주 사랑이 극진했으리라. 아버지는 사형제였으나, 박사사건 때 백부가 돌아가시고, 큰 삼촌은 형님의 원수를 갚는다며 자원입대하여 6.25 때 전사했다. 막내 삼촌은 두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정신을 놓아버렸다. 아버지만이 살아남아 가계를 이어왔다. 농사꾼으로 건강하던 그의 아버지는 여든일곱 되던 해, 이른 아침 콩밭에 일 나가려다 마루에 있던 농약을 소주로 알고 들이킨다.

 

응급실에는 나보다 더 왜소한 아버지가 병상에서 사시나무 떨듯 앉아 있었다.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백지장 같고 입술은 잿빛이었다. 병상 뒤로 가 아버지를 안았다. 어떻게나 떠는지 전율이 전이되어 나도 떨렸다.”

 

그날 아침의 다급했던 상황을 박기옥은 이렇게 기억했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지만, 후유증이 심했다. 기력 회복에 좋다는 양약과 한약을 다 구해 드렸지만, 아버지는 이 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농약사고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고 한다.

 

십여 년 전 박기옥을 처음 만났을 때 말투나 태도가 마치 조선 시대 선비를 보는 듯했다. 대동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중학교 진학을 못 하고 마을 서당에서 삼 년 간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논어등을 배운다. 지금도 입만 열면 그때 외운 구절이 줄줄 나온다.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중앙강의록을 사서 독학하여 고입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성광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예법을 중시하는 가풍과 성장기에 배운 한학은 박기옥 세계관의 뿌리이다. 인간에 대한 극진한 예의, 예스러운 말투, 명분을 중시하는 삶의 철학은 모두 이와 같은 배움과 환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순이 넘어 수필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어쩌면 청소년기에 배운 동양고전에서 문학의 씨앗을 찾을 수 있겠다.

 

 

수필가로 등단하여 새 인생을 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다. 고향 면사무소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사회복지와 새마을사업, 영농업무로 밤낮으로 일했다. 그런 와중에도 배움이 고파 통신대학 행정학과를 마쳤다. 당시 공무원 월급은 일반 기업체 사원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가장의 어깨도 점점 무거워졌다. 무엇보다 부인이 시부모를 모시고 농사일하랴, 애들 키우랴 고생이 심했다. 삶의 방향 전환이 필요했다. 고심 끝에 사표를 내고 1981년 나이 서른에 대구로 나가 사업을 시작한다. 야심만만하게 시작한 사업은 만만치 않았다.

 

어서 오세요. 당신의 물건을 사드릴게요, 라며 기다리는 고객이 어디 있겠는가. 사업을 벌인지 일 년도 채 못 되어 석유파동으로 거래처 여러 곳이 부도를 내어버렸다. 그 바람에 전답을 처분한 장사 밑천은 한방에 날아갔고, 겨우 극복하여 제자리를 잡는가 했더니 IMF의 회오리바람은 모든 자본금을 공중분해 시켜버렸다. 의욕은 사라지고 비 맞은 생쥐처럼 축 처졌다. 당장 걷어치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여곡절 산전수전을 겪으며 모리코트라는 사업체를 운영한 그는 그동안 마신 술 만해도 동네 뒷산 너머 저수지를 채우고도 남을 거란다. 그 와중에도 취미로 바둑과 테니스를 했고, 낚시도 즐겼고, 책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박기옥이 공무원을 하던 청년시절, 농촌계몽운동으로 동네에 개설한 재건중학교 교사를 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3공화국 시절, 재건국민운동의 일환으로 교회나 마을회관에 야학이 개설된다. 당시 농촌의 아이들은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대부분 농사일을 거들었다. 대처인 하양이나 대구로 나가 진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었다. 배움의 열정에 불타는 학생들은 밤마다 박사리 마을회관으로 모여들었다. 청년 박기옥은 처음엔 한자와 국어를 가르쳤다. 학생 수가 늘어남에 따라 대동초등학교 교실을 빌렸다, 다른 과목은 힘에 버거워 자취하던 학교 선생님의 힘을 빌려 운영했다. 그때 재건중학교에 다니던 참한 처자와 눈이 맞아 연애했다. 졸업식 때 답사할 학생을 선발하는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답사를 잘 읽던 여학생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스승과 제자로 만난 남녀는 훗날 부부의 연을 맺는다. 그때 야학의 제자들이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찾아온다. 그들의 자녀가 결혼식을 하면 주례도 많이 섰다. 박기옥의 삶을 더듬어보면 고향 마을과 깊이 얽혀 있다. 사업을 하던 시절에도 몸은 고향을 떠나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늘 고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모교와 고향을 생각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기계 윤활유를 취급하는 그의 사무실에 가면 책장에 책이 가득하다. 예전에는 주로 소설을 즐겨 읽었다. 수필가로 등단한 이후로는 수필집과 문예지, 수필동인지 등이 책꽂이를 채운다. 예순이 되던 해, 그는 사업 동료인 박현기 수필가의 권유로 수필문예대학에 발을 내디딘다. 수필의 매력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부부싸움을 해도 사랑채로 건너가서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가라앉고 평온해지대요.” 부지런히 작품을 쓴 그는 2009년에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을 하고, 2010년에 첫 수필집 고쳐 지은 제비집을 펴내고, 2014년에 두 번째 수필집 소금 세례를 출간한다. 대동초등학교 동창회와 모교 체육대회 때 수필집을 팔아 수백만 원을 모교 장학기금으로 내놓았다.

 

▲ 매일시니어문학상 시상식
 

 

뒤늦은 나이에 문학에 입문한 그의 수상 경력은 화려하다. 2014년 제1회 갓바위 스토리텔링 공모전 최우수상, 박사리 사건을 소재로 한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라는 작품으로 2016년 제2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경산의 문화유적지를 소재로 대구일보 전국수필대전에서도 여러 차례 입상했다. 2016년 박기옥은 경산문인협회 회장으로 취임한다. 산골 박사리에서 태어나 오늘날 여러 성취를 이루기까지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십여 년 남짓한 세월 동안 수필로 그가 남긴 발자취가 대단하다.

 

곁에서 지켜본 박기옥은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한번 무언가를 시작하면 끈질기게 매달린다. 또 한 가지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신실하다. 처음에 그를 만났을 때 나이가 한참 아래인 나를 어찌나 극진하게 대하는 지 민망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람을 소개시켜주어도 마찬가지다. 거추장스러운 예법을 싫어하는 나는 그의 이런 태도가 불편하기도 했다. 사람에게 밥을 대접하고, 인사를 하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선비가 환생한 듯 극진하다. 성장기에 몸에 배인 예절과 유가의 전통을 몸소 실천하는 박기옥은 선비의 후손답다.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

 

▲와촌면 박사리 무장공비 희생자 위령비(초창기)
 

 

박사리는 봄이 가장 아름답다. 어느 해 봄날, 차를 타고 박사리를 지나다가 탄성을 내질렀다. 연미색의 자두꽃이 들판을 뒤덮고 있었다. 마치 늦봄에 내린 눈꽃처럼 하얗게 들판을 뒤덮은 자두꽃은 봄의 판타지였다. 봄날의 환영처럼 잠깐 피었다지는 자두꽃은 초여름에 열매를 맺어 와촌 자두라는 상표명을 달고 전국으로 팔려나간다. 자두꽃은 박사리의 슬픔조차도 승화시키는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태풍 쁘라삐룬이 상륙하던 날, 박기옥을 인터뷰하려고 대구 산격동에 있는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는 이웃에서 얻은 와촌 자두를 내놓았다. 맛만 보려던 나는 내처 세 개를 먹어치웠다. 살이 두텁고 달짝지근한 맛이 좋았다. 설탕의 단맛과는 다른 은은한 자연의 맛이었다.

 

비극의 시작은 동강리에 사는 도달권의 거짓말에서 시작되었다. 갓바위 동쪽 골짜기 양시골로 나무를 하러 간 도달권은 공비들의 은신처를 발견했다. 놀란 그들이 총을 들이대며 어디서 왔냐고 묻자, 도달권은 얼떨결에 박사리에 산다고 둘러댔다. 지서에 신고하지 않는다는 다짐으로 무사히 풀려난 그는 지서에 신고를 했고, 군경합동 작전으로 78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다. 남은 공비들은 보복으로 박사리를 공격한 것이다.

 

박사 사건은 19491129(음력 1010) 저녁에 일어났다. 밤하늘에 차오르는 상현달이 달빛을 고샅과 초가지붕에 골고루 뿌려대고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릴 무렵, 온 마을에 괴기가 감돌았다. 총과 죽창, 긴 칼을 든 검은 그림자들이 골목을 점령했다. 그들은 중요한 연설을 한다며 사랑방에 놀고 있는 청·장년들을 논 마당으로 끌고 나갔다. 어디서 총성이 들렸다. 그것을 신호로 마을 전체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공비들은 집집이 습격했고, 도망칠 기미가 보이면 바로 몽둥이와 칼을 휘둘렀다. 공비들은 그날 청·장년 38명을 죽이고, 28명에게 큰 상처를 입혔으며, 초가 108채를 불태웠다. 마을은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그때 집안의 어른인 큰아버지도 돌아가셨다.”

 

그 사건은 박기옥이 태어난 지 칠 개월 무렵 일어났다. 그의 부친 박한조(朴漢祚)는 저녁을 먹은 후 동네 사랑방으로 밤마실을 나갔다가, 감기 기운이 있던 어린 아들이 걱정되어 일찍 귀가한다. 아들 덕분에 그날의 비극에서 빗겨나 천우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만약 그날 부친이 일찍 귀가하지 않았다면, 불귀의 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박 씨 집안의 사형제 중 그의 부친이 유일한 생존자이다. 큰아버지도 박사사건 때 돌아가셨다. 박사사건으로 풍비박산 난 집이 한두 집이 아니지만, 집안 어른이던 백부의 죽음은 박 씨 집안에 큰 상처로 남았다. 이런 연유로 박기옥은 박사사건 진실 규명에 앞장선다. 시간과 돈을 투자해 해마다 위령제를 지내고, 유족의 증언과 사실을 기록한 책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홍익출판사, 2016.)까지 발간한다.

 

전국에 흩어져있는 사망자의 유족과 중상자 가족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었다. 때로는 전화로, 때로는 편지로, 직접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같이 마음 아파한 이웃도 만났다. 울먹이며 진술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했다. 특히 부상자 중, 생존자의 증언을 들을 때는 그도 울고 나도 울었다.”

 

박기옥은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한 사실을 규명하고 진실을 밝히고자 동분서주한다.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유족은 직접 찾아가 사진을 찍고, 구술을 채록한다. 칼에 찔린 목과 등의 흉터, 손목이 잘린 채 일생을 살아온 이의 모습 앞에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부모 형제를 잃고 힘든 세월을 살아온 유족 일부는 증언조차 하길 꺼렸다. 유족 대부분이 고령이라 사건의 진실 규명과 보상은 더 시급한 과제이다. 그는 남편이 동네일에 발 벗고 나서서 돌아다녀도 묵묵히 뒤에서 지원해주는 아내와 가족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지금 그는 유족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고자 서명 운동을 진행 중이다. 박사 사건 때 희생된 마을 주민의 명예를 회복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유족에게 국가보상금을 받게 해주려는 목적이다.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를 걸고 오늘도 박기옥은 서명지를 들고 축제장으로 시청으로 발품을 판다. 지금도 그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회의를 스스로 극복하며 국가인권위원회, 보훈처로 탄원서를 보내고 있다. ‘제주 4·3 사건이나 경산 코발트 광산 사건처럼 국가기관의 직접 가해는 아니지만, 군경합동 토벌에 대한 보복성 공격으로 무고한 마을 주민이 희생되었기에 국가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박사리 사건처럼 명백한 국가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가엾게 죽은 영혼에 대한 추모와 진실 규명은 필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역사는 이렇게 누군가의 의지와 희생으로 한걸음씩 진보한다.

 

 

마지막 꿈을 위하여

 

박기옥은 올해 일흔이다. 그럼에도 그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많다. 개인적인 소망으로는 자전적 소설을 한 편 쓰고 싶단다. 수필집을 두 권이나 냈으니 할 말은 다 했을 텐데 굳이 소설을 쓰고 싶은 이유가 무얼까. 수필은 장르의 특성 상 작가의 실제 체험을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차마 다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가 많을 터, 그가 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아낼 이야기가 자못 궁금하다. 일흔의 나이에도 글쓰기의 꿈을 가진 그가 부럽다.

 

또 다른 꿈은 향토 출신 작가를 기리는 문학비 세우는 운동을 하고 싶단다. 경산 출신의 훌륭한 작가가 많지만, 변변한 문학비 하나 없다. 경산시보건소 뒤 남매지 공원에 서지(西芝) 김윤식 시비가 있을 뿐이다. 그는 요즘 남천면 출신 이동하 소설가의 작품 우울한 귀향의 무대인 삼성역을 자주 간다. 소설의 첫머리에 삼성역이 나오는데, 역 주변을 이동하 소설무대로 재현해서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만들고 싶단다. 거슬러 올라가 경산자인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경산 안심(대구 반야월)에서 집필에 전념하다 요절한 백신애 선생, 경산 자인에서 출생하여 120여 편의 장·단편 소설을 써서 한 시대를 풍미한 장덕조 선생. 그분들의 흔적을 길이 남기고 싶은 것이 박기옥의 소망이다. 소설가 김유정을 기리는 강원도의 실레 마을처럼 경산에도 그런 문학의 무대를 한두 군데 조성하면 좋겠다. 시청과 의회, 시민사회, 경산문협이 함께 지혜를 모아 시민공원에 경산출신 작가의 시비 세우는 사업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설사 그의 꿈이 당장은 이루어지지 못하더라도, 문학도인 나도 그의 꿈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언젠가 박사리의 박기옥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옛집을 리모델링한 시골집은 소박하고 정갈했다. 귀향할 때 부인은 옛집을 허물고 번듯한 양옥으로 새집을 짓자고 했다. 그는 생각이 달랐다. “이 집은 부모님의 따뜻한 체취와 숨결이 스며있고, 올망졸망한 남매가 쌓아온 정겨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라며 부인을 설득하여 옛집을 고쳐서 살고 있다. 마당에 푸성귀도 심고, 화단을 가꾸면서 사계절의 변화를 즐긴다. 그 집에는 해마다 제비가 날아와 처마에 둥지를 튼다. 봄이면 제비가족이 찾아오고, 방학이면 손자손녀들이 그의 품으로 찾아온다. 그는 귀향의 꿈을 현실에서 이루었고, 고향의 흙 내음을 맡으며 살아간다. 무엇보다 사람살이의 소중함을 알고, 고향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 이 기사는 박기옥의 수필집 두 권과 박사사건을 기록한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의 내용을 일부 인용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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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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