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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19-08-23 오전 11:48:00

허주원. 평범한 촌부의 특별한 인생살이
[이경희의 소가 외다리 건너는 이야기]

기사입력 2018-08-31 오후 3:38:12

▲ 허주원 씨 부부




허주원의 삶을 증명하는 것들

 

분홍색 보따리를 풀자 각종 표창장과 상장, 수료증, 상패 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허주원이라는 한 인물의 삶을 증명하는 것들이다. 가장 최근에 받은 것은 경일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수여한 고령층정보화교육 수료증과 표창장이다. 1938년생이니 올해 여든 살이다. 한 존재의 발자취를 증명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나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저서로 흔적을 남기고, 뛰어난 인물은 역사의 장에 이름 석 자를 올리기도 한다. 허주원이라는 인물은 평범한 촌부이나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표창장과 상패만으로 어찌 그의 삶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으랴. 하지만 나는 그가 부끄러운 듯 내미는 보따리 속 물건들이 자랑스러운 삶을 살아온 징표임을 눈치 챘다.
 

허주원은 시천리 새마을지도자, 와촌면 바르게살기위원, 와촌면 재향군인회장, 하양향교 성균관유도회 와촌회장 등 굵직한 이력을 지녔다. 상훈 및 표창 이력도 화려하다. 청소년선도 감사장, 저축증대 표창장, 농촌지도자육성 공로패, 향군발전공로 표창장 등. 근래에는 친환경현대미술대전 서예부분 수상, 어르신정보화경진대회 수상도 했다. 그가 내민 표창장 가운데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예비군 와촌중대 제3소대장 시절 경산경찰서장이 수여한 표창장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의인상義人賞인 셈이다. 196952일 오전 11시경 시천동 앞 노상에서 소매치기를 추격해서 붙잡은 공로로 받은 상장이다. 그날은 하양 장날이었다. 근동에서 모여든 장꾼들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장날 시외버스는 콩나물시루에 비견할 만큼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청통면 개포동에 사는 손완갑은 소를 판 돈 오천삼백 원(현 시가 오백여만 원)을 버스 안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 마침 시천리 마을 앞에서 내린 소매치기는 돈을 들고 줄행랑을 쳤다. 도망자가 범인임을 직감한 허주원은 일 킬로미터 가량 추격하여 격투 끝에 붙잡아 와촌지서에 인계했다. 의협심과 봉사정신이 강한 허주원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일제가 대륙 정복의 야욕을 불태우며 만주사변을 일으킨 그해, 허주원은 정미소집 넷째로 태어났다. 위로 형님 두 분, 누님 한 분, 남동생이 있다. 오로지 가계를 이어갈 장남만을 섬기던 시절이었으니, 집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거나 관심을 받기 힘든 서열이다. 여덟 살에 누나와 형을 따라 와촌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일본인 선생이 너무 무서워 학교를 쉬고 있던 중, 해방을 맞았다.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하양초등학교에 다시 입학하여 졸업한다. 아버지가 정미소를 운영하여 가계는 넉넉한 편이었다. 정미소집 아들이라면 밥은 굶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니 그의 성장기는 유복했다. 대구의 대륜중학교와 대구농림학교로 진학하였다. 금호역에서 대구역까지 기차를 타고 육 년을 통학했다. 기차는 툭하면 연착이었다. 대구역에 내려 수성동 학교까지 걸어가면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자연히 공부는 뒷전이었다. 스물하나에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그는 오 년 장기하사로 복무하면서 포항수산전문대학을 주경야독으로 졸업한다.

 

허주원의 이력을 살펴보면 끊임없이 이런저런 사회단체 활동을 했다. 농사일을 하면서 사회단체 활동이 쉽지 않았을 터, 타고난 성품이 특별한 여정의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이력과 두 번의 인터뷰 끝에 허주원이라는 인물이 부지런하고, 사람 좋아하고,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성격이 부모님 중 누구를 닮았느냐는 물음에 어머니 쪽이라는 대답을 한다. 그의 모친은 자식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아버지가 소를 몰고 지붕에 올라가라 하면 못한다고 하지 말고, ‘아버지, 제가 지붕에 한번 올라가 볼게요라고 대답해야 한다.”라고. 모친의 이런 교육이 칠십 중반에 컴퓨터를 배우겠다고 도전하게 만든 근원이리라. 봉사하고 도전하는 허주원의 긍정적 세계관이 형성된 연원이 어머니의 이런 교육관 덕분이 아닐까. 과묵하셨던 부친은 와촌 박사리 사건이 나던 날(1949년 음력 1010) 돌아가셨다. 간염을 앓고 계셨던 아버지는 그날 하양장에 가셔서 약주를 거나하게 드시고 귀가했다. 그날 장꾼들 사이에 흰두루마기를 입고 칼빈총을 맨 사람을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난다.

 

 

표창장의 반은 부인의 공으로



























 

태풍 솔릭이 무사히 지나가고 비가 내리던 날, 와촌면 소재지 어느 사무실에서 허주원과 첫 인터뷰를 했다. 나이보다 훨씬 젊고 건강한 인상이었다. 그는 와촌면에서는 유명 인사였다. 첫 만남의 자리에는 와촌새마을금고 전무를 지냈고 먼 친척인 허이열과 와촌조합장과 시의원을 지낸 이창대가 동석했다. 이 세대는 본인의 삶을 직접 이야기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주변 사람의 이야기가 오히려 객관적 정보가 될 수도 있다. “재향군인회회장과 새마을지도자 하면서 자비를 들여 회원들 밥 사줘가며 단체를 활성화하는데 앞장섰지요. 또 새로운 농사기법도 남 먼저 배워 동네 사람들한테 전파하고,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앞장서 도와주고 하니 후배들이 많이 따릅니다.” 인터뷰 인물로 그를 추천한 허이열은 한마디로 사심 없이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옆에 앉은 후배 이창대는 형님은 무엇이든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도전정신과 꾸준히 자기계발을 하는 모습은 후배들의 귀감이지요.”라며 거든다. 그런데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반도 듣지 못한 채 사무실을 나왔다. 체면을 중시하는 경상도 정서상 자기 인생을 가감 없이 말하기 어렵다. 허주원은 비가 내리는 주차장까지 나와 나를 배웅했다.

 

첫 인터뷰를 마치고 이틀 후 나는 무작정 허주원의 집을 찾아가겠다고 통보했다. 그의 부인이 궁금했다. 남편이 바깥 활동을 하려면 부인의 인정과 내조가 없으면 불가능하니까. 압량 현흥리 정미소집 둘째딸인 김화자는 스물넷에 시이모의 중매로 스물여덟 허주원과 혼인한다. 평생 농사일을 한 촌부이나 얼굴이 곱고 키도 훤칠하다. 젊은 시절에는 인물 좋다는 칭송을 꽤나 들었을 법하다. 부부는 육남매를 두었다. 혼인 후 내리 딸 넷을 낳고나니 시어머니와 신랑 볼 낯이 없었다. 딸 낳은 것이 어디 여자만의 탓인가. 하여간 그 시절에는 그랬다. 어찌하여 귀한 아들을 하나 낳고나니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아들 하나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싶어 하나 더 낳았는데 또 딸이었다. 그렇게 육남매를 키워 결혼을 시켰다. 아들 딸, 손주손녀, 사위가 농사철 되면 일요일마다 와서 대추 따는 일을 거든다. 허주원은 젊었을 때는 버럭 화도 잘 냈지만, 나이가 드니 아내의 소중함을 느끼는 요즘이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 부인이 노래교실 갈 때 차도 태워주고, 밭일하다가 반찬 걱정하면 외식도 한다. 어쨌든 허주원이 받은 상패와 표창장의 반은 부인에게 공을 나누어야 하리라.

 


 

허주원의 집은 와촌면 시천마을 대추밭 안에 있었다. 강아지 두 마리가 격렬하게 짖으며 낯선 방문객을 환영한다. 아래채 앞 작은 화단에는 장미와 육손이, 모과나무, 방울토마토 등이 계절을 건너고 있었다. 청통천 둑길 옆 이천 평 대추밭에는 연두빛 대추가 알알이 영글고 있었다. 큰 것은 어른 엄지손가락보다 더 굵다. 대추나무 둥치가 굵고 튼실해 보여 몇 년 생이냐고 물으니 한 이십오 년 되었다고 한다. 대추밭이 울울창창한 밀림처럼 느껴질 정도로 잎과 열매가 무성했다. 그런데 올해 대추농사 작황은 별로란다. 개화기에 기온이 낮아 꽃이 좋지 않았고, 무더위가 심해 예년만 못하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 실림을 난 부부는 사과, 포도 등 과일농사를 주로 지었다. 인근에서 허주원 대추하면 상인들도 알아줄 만큼 그의 농사이력은 만만찮다. 대추 농사의 비결을 물었다. 농업기술센터에 가서 교육도 열심히 받고, 해마다 영농일지를 써서 다음 해 농사에 참고한 것이 비결이란다. 욕심이 과해 실패도 여러 번 겪었다. 본래 농사란 토질과 기후, 인간의 손길과 하늘의 기운이 잘 맞아야 하거늘, 어찌 해마다 풍년을 바라겠는가. 실패의 원인을 하나씩 연구하면서 극복하다보니 대추농사 전문가로 소문이 났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으니 성공한 인생이라 인정해도 괜찮겠다.


 

일기장에 기록된 삶의 흔적들

 


 

허주원의 안방 책장에는 보물이 있다. 다름 아닌 일기장이다. 검은 비닐 커버로 된 수첩에 매일 일기를 썼다. 해마다 한 권씩 썼으니 십여 권이 모였다. 그날그날 농사일이나 바깥 볼일, 가정의 대소사를 메모나 짧은 글로 적은 공책이다. 건강정보나 노래가사도 간혹 보인다. 이 외에도 세금고지서, 영농자재 거래명세표, 전기요금 영수증 등 일상의 삶을 증명하는 서류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 인터뷰에서 만족한 대답을 얻지 못한 나는 일기장을 보자 눈이 번쩍 띄었다. 일기장을 자세히 훑어보면 허주원의 일상과 삶의 모양새가 그려질 것 같았다. 허주원은 별 것 아니라면서 쑥스러워했지만, 내 눈에는 보물보다 귀한 자료이다. 일기장을 빌려와 흘림체로 쓴 문자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보니 감이 왔다. 예상보다 많은 정보가 들어있었다. 그날그날 소소한 일상사를 적고 자신의 생각이나 감상도 덧붙인 글은 흥미진진했다. 촌부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장이 개인의 역사서이며 가족사가 아닌가. 기록의 가치를 인식하고 쓴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일기는 가족사와 지역사, 사회사를 아우르는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수첩을 이리저리 넘기다보면 촌부의 하루가 훤히 떠오른다. 그날 농사일은 무얼 했는지, 누구와 술을 한 잔 했는지, 사소한 가정사와 경제적 지출까지 다 보인다. 그의 수첩은 말하자면 가계부, 영농일지, 일기장을 겸한 종합 기록장이었다. 2016412일에 쓴 글은 생전 유언장인데, 인감도장을 공책의 여러 군데 찍어놓았다. 소생 불가능할 경우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임종 시에 가족과 나누고 싶은 말까지 다 적어놓았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를 용서하세요.” 죽음의 준비를 철저히 해 놓았다. 누구나 생각은 하지만, 실천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유언장까지 써놓다니 놀라웠다. 허주원의 일기장은 공적 기록이 간과하는 개인의 삶, 시민의 삶을 기록하고 증명하는 사료로서 충분한 가치를 담고 있었다. 오래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사무실에서 가져온 유품이라고는 몇 권의 수첩뿐이었다. 삼우제를 지내던 날 아버지의 옷과 수첩을 태웠다. 망자의 혼과 함께 보내는 것이 상례였으니까. 훗날 돌이켜 생각하니 아버지의 친필로 쓴 수첩을 한 권이라도 남겨둘걸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그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유품을 소중히 간직해주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살아오면서 후회스러운 일은 없냐는 질문을 던졌다. 잠시 생각에 잠긴 허주원은 말이 없었다. 어느 인생인들 돌아보면 후회가 없으랴. 나는 말하지 않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해방 전에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은 이라면 다들 공직이나 회사 생활을 꿈꾸었다. 넉넉한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니 굳이 객지 생활을 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걱정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침묵이 내포한 회한이 사회봉사라는 길로 삶을 이끈 것은 아닐까. 어쨌든 지역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열정을 불태운 인생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대추밭을 배경으로 부부사진을 찍었다. 그림이 참 좋았다. 인사를 하고 차 시동을 거는 데 부인이 보따리 하나를 차에 실어준다. 직접 농사지은 양파와 감자, 가지를 싸주었다. 농부의 손길과 마음이 담긴 농산물은 값으로 매길 수 없다. 귀한 선물을 받고 대추밭집을 나섰다. 여든인 그가 뒷방 늙은이로 노년을 허비하지 않고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비결이 무얼까.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무엇이든 배우는 자세, 욕심 없이 베푸는 성격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백세시대, 잉여로 주어진 노년기를 허주원은 아직도 현역처럼 살고 있다. 타고난 성품과 후천적 노력이 영원한 현역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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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댓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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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촌면장 최순이
    2018-09-04 삭제

    우리지역에 이렇게 멋진분이 계셔서너무 좋습니다 매사에 늘 부지런하고 봉사하고 열심히 사시는 허주원어르신인줄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인터뷰 내용 보고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지금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사모님과 행복하십시요 그리고 멋진 소식 전해준 경산인터넷뉴스 감사합니다

  • 이경희
    2018-09-03 삭제

    맏사위와 친구 분이 들어오셔서 댓글을 남기셨네요. 작가로서 감사드립니다. 한 인간의 삶을 글로 나타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제가 표현하지 못 한 허주원 어르신의 훌륭하신 점도 많을 겁니다. 널리 이 글을 알려주시고 책으로 나오면 가족들이 함께 축하해주십시요.

  • 맏사위 올림
    2018-09-02 삭제

    아버님의 훌륭하신 삶에 찬사를 보냅니다. 무엇이든 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고, 두려움없이 도전하시고, 남을 위해 봉사,희생할줄 아시는 참된 삶을 요즘 우리 젊은세대가 실천해야될 귀감이 된 것같습니다. 자식된 입장에서 자랑스럽고, 영광스럽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감사드립니다.

  • 맡사위 올림
    2018-09-02 삭제

    아버님의 훌륭하신 삶에 찬사를 보냅니다.무엇이든 하시는일에 최선을 다하시고 두려움없이 도전하시고 남을위해 봉사희생할줄 아시는 참된삶을 요즘 우리젊은세대가 본받아 실천해야될 귀감이된것 같습니다.자식된 입장에서 자랑스럽고 영광스럽습니다.감사합니다.만수무강하십시오.

  • 전종헌
    2018-08-31 삭제

    허주원씨는 인정이 넘치고 사교성이좋아나와는 나이차이가 나지만 형제못지않게친하게 지내는 사이입니다 서로만남은경일대학 평생 교육원에서 만나 여러해동안정을 나누며 동문수학을 한사이 입니다현제도 가끔 소주한잔도 주고받으며 만나고영원히 변치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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