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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19-07-17 오후 4:39:00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만드는 사람 - 김성택
[이경희의 소가 외다리 건너는 이야기]

기사입력 2019-04-02 오후 1:29:40

▲ 사랑의 희망은행 총재 김성택



장독대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들판에 봄의 기운이 수런거렸다. 복사꽃이 종기 같은 꽃망울을 막 터트리고 있었다. 남산 평기리에서 흥정리, 조곡리를 거쳐 하대리 입구까지 자동차로 천천히 달렸다. 비발디의 봄의 선율이 귓전에 울려 퍼지는 듯하다.

 

남산면 갈지리에 있는 장독대한식당은 김성택의 사업장이자 집이었다. 장독대는 경산의 맛집에 선정될 만큼 음식 맛이 뛰어나다. 장독대가 경산과 청도의 경계인 평기리에 있던 시절,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친구들과 수제비를 먹으러 자주 갔었다. 조미료를 넣지 않은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장독대의 실제 운영은 그의 아내 김동화의 몫이다. ‘사랑의 희망은행총재직을 맡아 동분서주하는 남편 대신 아내가 식당 운영을 도맡고 있다. 식당 벽면에는 김성택이 받은 표창장과 감사패, 사진이 진열되어 있다. 그의 아내는 밝고 순박한 인상이었다. 바깥 활동에 열심인 남편에게 불만이 없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같이 붙어서 싸우는 것보다 밖에 나가서 봉사하는 게 낫잖아요. 술 담배 도 안 하고 성실해요. 어려운 사람 도와주니 언젠가는 보답이 오겠지요.”

밭에서 민들레와 냉이를 캐와 나물거리로 다듬고 있는 아내 곁에 김성택이 앉는다. 사진 한 장 찍자고 하니 민들레를 들고 포즈를 취한다. 그러고 보니 부부의 눈웃음이 닮았다. “선생님, 장가 잘 가셨네요.”라며 농을 던지자 그는 그 말을 외면하고 자리를 피해버린다.

 

김성택은 1954년 생으로 예순여섯이다. 오남일녀 중 둘째 아들이다. 청도 운문면 신원리에서 출생하여 강원도 산골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그의 부친은 산판일을 했다. 아버지의 일터를 따라 세 살 때 봉화로 갔다가, 일곱 살 때 강원도 홍천으로 이주한다. 부친이 병환으로 산판일을 쉬게 되자 일가는 홍천군 내면 문바위골로 들어간다. 일꾼 이십여 명을 거느린 참숯가마를 운영하여 제법 돈을 만졌다.

 

당시 문바위골에는 다섯 가구가 살았다. 아버지가 참숯가마를 한 덕분에 그의 형과 김성택은 초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육성회비를 낼 형편이 못되는 산골 아이들은 초등학교도 갈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의 등교기는 옛날이야기처럼 흥미진진했다. 겨우 일곱 살짜리 아이가 매일 왕복 사십 리 산길을 걸어 다녔다니 놀라웠다.

 

아침 여섯 시에 도시락을 사서 집에서 출발하여 고개를 넘고 또 넘었다. 학교에 도착하면 사 교시쯤 되었다. 교실에 들어가 도시락을 먹고 한 시간 공부를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해가 졌다. 이틀 연속 학교에 가면 미국에서 원조한 옥수수가루를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옥수수빵은 별미였다.

 

학교 가는 길에는 온갖 일들이 일어났다. 산토끼가 보이면 토끼사냥을 하고, 비가 오면 바위 밑으로 피해 그치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계곡에 물이 불으면 어른들이 형제를 업고 건너야만 했다. 계곡에서 가재도 잡고 산에서 버섯을 따고 산나물을 뜯고 자랐다. 산이 놀이터이자 일터였다.

 

강원도의 겨울은 눈으로 시작해서 눈으로 끝이 난다. 지붕 높이만큼 눈이 쌓일 때도 있었다. 눈이 오면 다람쥐가 먹이를 찾아 민가의 마당으로 내려왔다. 낚싯대로 다람쥐를 잡으면 마리 당 오 원을 받았다. 다람쥐는 일본으로 수출했는데 눈이 쌓여 길이 막히면 업자가 오지 않았다. 그러면 잡은 다람쥐를 풀어주었다가 또 잡곤 했었다. 잔디씨도 모아 수출하던 시절이었으니 다람쥐도 경제성장의 한몫을 했다.

 

숯을 구워놓으면 서울에서 상인들이 미제 트럭을 타고 문바위골까지 왔다. 돈과 쌀을 가져와 숯으로 바꾸어갔다. 은행도 없던 시절이라 숯을 판 돈을 사과상자에 담아 윗목에 두었다. 어느 날 일꾼 한 명이 아버지에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이자를 높게 쳐 줄 테니 돈을 빌려달라고. 순진무구한 그의 부친은 일꾼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돈 상자를 내주었다. 높은 이자를 준다던 일꾼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이 사건은 김성택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다. 임금을 주지 못한 일꾼들에게 숯가마를 다 내어주고 가족은 빈손으로 서석면 소재지로 나왔다. 이후 그의 가족이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녹음기를 틀 듯 그때 사기를 당한 아버지를 원망했다.

 

김성택이 여덟 살 때 홍천군 서석면으로 나온 가족은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부친은 뻥튀기 기계를 구입하여 장사를 했다. 뻥튀기 기계는 당시 인기가 좋았다. 장날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옥수수 한 되를 튀겨주면 삯으로 한 되를 받았다. 쌀을 튀겨주면 삯으로 이십 원을 받았으니 괜찮은 장사였다.

 

장날이 아닌 무신 날에는 아버지가 뻥튀기 기계를 지게에 지고 산골 동네를 찾아다녔다. 돈이 좀 모이자 짐자전거를 사서 뒤에 싣고 다니셨다. 가장의 자리는 무쇠로 만든 뻥튀기 기계의 무게만큼 책임을 지우는 자리다. 그렇게 번 돈으로 형제들을 대구의 외가로 보내 유학을 시킨다. 1978년 부모님도 대구로 이주한다. 둘째 아들과 며느리의 효도를 받다가 부친은 여든한 살에 돌아가셨다.

 

 

- 남산에 아내와 장독대 식당을 열다

 

열여덟 청년 김성택은 마드로스가 되기 위해 부산의 삼촌을 찾아간다. 일자리가 귀하던 때라 원양어선 선원은 당시 젊은이들의 꿈의 직장이었다. 돈도 잘 벌고 외국 구경도 할 수 있으니 어떻게든 배를 타고 싶었다. 해군 출신인 삼촌의 힘을 빌리면 배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삼촌이 배 타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일이 험하고 고생스러운 데 조카를 보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작은집은 부산의 영주동 아파트 삼층이었다. 이층에는 김천 가릿재 마을에서 온 참한 처녀가 친척집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여동생과 친하게 지냈다. 김성택이 계단을 오르내리면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아는 체를 했다. 그렇게 그와 그녀는 눈이 맞았다.

 

▲ 젊은 시절 김성택 부부
 

 

마드로스의 꿈이 좌절되자 김성택은 군대를 간다. 그녀는 군인이 된 친구의 오빠에게 위문편지를 열심히 보낸다. 첫 휴가 때 서울에서 그와 그녀는 재회한다. 자대로 돌아간 김성택은 휴가 나가는 졸병에게 그녀의 주소를 가르쳐준다. 그녀를 만나 꼭 면회 오라는 전언을 부탁한다.

 

그녀는 철원 군부대까지 무려 네 번이나 김성택에게 면회를 간다. 교통이 편한 지금도 대구에서 철원까지 꼬박 하루가 걸린다. 하물며 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하는 시절이었으니 삼박사일이 걸렸다. 김성택과 김동화는 그렇게 사랑을 키웠고 예쁜 딸까지 얻었다. 군 제대 후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는다.

 

김동화는 삼십이 년째 식당을 운영 중이다. 만촌동에서 시작한 식당은 대구 들안길로 확장한다. 그러나 외환위기는 부부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하루아침에 빈손이 된 부부는 남산 평기리로 들어온다. 마당에 풀이 우거진 집을 청소하고 김성택이 직접 인테리어를 한다. 민속주점식 인테리어와 토속음식으로 입소문을 타고 손님이 몰려왔다. 경산 시내에서 차로 삼십분 이상 떨어진 거리지만, 점심시간이면 손님이 줄을 섰다.

 

장독대는 음식 맛도 일품이었지만, 농경시대에 사용했던 민속품이 볼거리였다. 집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고 가보면 옛날 물건을 소각하거나 버리기 일쑤였다. 유년기의 추억이 서린 물건을 하나씩 얻어 와서 식당에 진열하기 시작했다. 대소쿠리, 디딜방아, 풍로, 인두 등. 그 가운데 대나무로 만든 삿갓은 민속품으로 가치가 높은 물건이었다. 인테리어 소품으로 사용하던 민속품은 나중에 경산시립박물관에 기증했다.

 

부인이 식당을 경영하는 동안 김성택은 건축일을 했다. 손재주를 타고난 그는 금방 일을 배워 업자가 된다. 집 짓는 일을 주로 했다. 건축일은 육십 여 분야가 협업하는 복잡한 일이다. 업자였던 그는 두 가지를 철저히 지켰다. 공사기일과 돈 약속이다. 무엇보다 일꾼들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업자의 역할이었다.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모든 공기가 어긋난다. 아마도 건축일을 하면서 김성택은 리더십을 키웠고, 함께하는 일의 가치를 획득한 듯싶다.

 

 

- 사랑의 희망은행, 기적을 만들다
 

사랑의 희망은행 사무실을 처음 방문한 것은 강의 때문이었다. 자원봉사수기 쓰기에 대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첫 발을 디뎠다. 사무실의 열기는 뜨거웠다. 순수 회원들의 후원금만으로 단체를 운영한다고 했다. 금액도 평균 월 일만 원 후원자가 대부분이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생계 자체가 위협을 받는 세상에 남을 위해 조건 없이 봉사를 하다니 놀라웠다. 무릇 봉사람 타인을 위해 내 것을 온전히 내어주는 것이 아니던가. 몸과 시간을 내어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이의 마음이 궁금했다.

 

나를 보고 사람들이 봉사에 미친 사람이라고 하대요. 나처럼 미친 사람이 있어야 없는 사람들이 살 수 있어요. 나는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데 봉사하니까 좋은 사람이라며 칭찬을 하대요. 무엇보다 봉사하면 많이 배워요. 열심히 살아야겠다. 살만한 세상이다, 내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자긍심도 생겨요.” 김성택의 봉사예찬론을 들은 나는 숙연해졌다.

 

강원도에서 보낸 유년시절 동네마다 거지가 많았다. 주로 가족 단위로 미제분유 깡통을 들고 밥을 얻어먹으러 다녔다. 그들은 집이 없으니 가마니로 만든 움막이나 다리 밑에서 생활했다. 강원도의 겨울은 거지가 동사할 정도로 춥다. 겨울이 되면 그의 부친은 걸인들을 집으로 데려왔다.

 

내 식구만 해도 여덟 식구인데, 걸인가족까지 집안에 들였으니 집안은 저녁마다 북적거렸다. 어떤 때는 걸인가족이 육남매에게 구걸한 돈을 주기도 했다. 김성택은 부모님의 이웃사랑을 자연스럽게 보고 배운다. 어쩌면 그가 자원봉사라는 새로운 세계로 뛰어든 것은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경산강원도민회 회장, 대구강원도민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던 김성택은 2002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동사모회원이 된다. 회원이 경상남북도만 사천오백여 명에 달하는 큰 단체다. 회원 몇몇이 사비를 털어 매달 한 번씩 두류공원에 나가 노인무료급식 봉사를 했다. 그때 같이 활동하던 경산지역의 모 회원이 저소득가정에 쌀과 연탄 긴급지원을 요청했다. 이 일이 시발점이 되어 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가정이나 독거노인 지원요청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2007년 무렵 대구 송현동의 조손가정을 동사모회원이 소개했다. 초등학교 일학년이던 정민이에게 매달 삼만 원을 지원했다. 그때 사회복지담당 공무원이 김성택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 일회성 지원은 부작용이 많으니 정민이를 위해서 지속적인 지원을 해주라고. 교회에서 쌀도 갖다 주고 다른 단체에서 생필품도 지원해주는데, 사진만 찍고는 일회성으로 그쳤다. 그 말을 듣고 오년 간 정민이를 지원했지만 사진을 찍지 않았다.

 

어느날, 아이의 휴대폰에서 나는 죽고 싶다라는 글귀를 발견한다. 갈 때마다 아이와 대화를 했다. 초복날, 후원 회원들과 삼계탕을 사주러 갔더니 할머니가 우리 정민이가 드디어 꿈이 생겼심더. 지도 자원봉사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네요.” 라고 말했다. 자원봉사의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자원봉사의 경험과 가치를 쌓는다.

 

2013년 남부동의 독거노인집을 방문했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기저귀를 차고 누워있었다. 지식들은 사업실패로 연락두절이고, 집도 압류된 상태였다. 쌀은 동사무소에서 지원하지만 연탄이 없어 냉방에서 겨울을 날 형편이었다. 김성택은 그 자리에서 연탄집에 전화해서 사비로 연탄 오백 장을 넣어준다. 그날 동행한 남부동 이정숙 통장이 옆집에 더 어려운 이웃이 있다고 했다.

 

이튿날 다른 집을 방문해보니 말문이 막혔다. 할머니는 기저귀를 차고 누웠는데, 가족이 없어 이웃 할아버지가 도와주고 있었다. 기저귀 값과 난방비가 문제였다. 고민하던 김성택은 휴대폰을 열어 지인들에게 문자를 날렸다. 연탄 한 장 값이 사백오십 원이니 연탄 열 장 값인 사천오백 원씩만 보내달라고.

 

기적이 일어났다. 하루 만에 백칠십만 원이라는 돈이 들어왔다. 대부분 만 원씩 보냈다. 백칠십만 원으로 할머니집과 다른 집 연탄을 지원하고, 남는 돈으로는 대구의 소녀가장집에 텔레비전을 새로 사주었다. 이 경험은 평범한 시민들의 작은 도움이 기적을 낳는다는 믿음을 주었다.

 

▲ 사랑의 희망은행 회의
 

 

이정숙 씨와 사랑의 희망은행이라는 봉사단체 결성을 추진한다. 현재 회원이 천이백 명, 매달 기부를 하는 후원자는 이백 명이다. 작년에는 KBS 동행이란 프로그램에 요청이 와서 촬영도 했다. 서상동 조손가정의 집수리 봉사였다. 무너진 담장도 고치고, 재래식 화장실도 바꾸고, 물이 새는 지붕도 수리했다. 이틀에 걸쳐 열세 명의 회원들이 나와 참여했다.

 

돈을 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 회원들은 일은 서툴지만 각자 가진 재능을 기부합니다. 봉사를 하면서 서로 격려하고 일을 하고나면 그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김성택은 현재 사랑의 희망은행총재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회원들의 복지를 위한 휴양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열심히 봉사하는 회원들을 위해 총재로서 무언가를 해주어야한다. 휴양시설을 지으려면 땅과 돈이 필요한데, 지금 고민 중이란다.

 

그가 오랜 세월 총재직 자리를 수행할 수 있는 비결이 궁금했다. “혼자 다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무엇이든 회원들과 같이한다는 생각으로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면 됩니다. 내게 상을 준다고 연락이 오면 사양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단체는 수입지출 관리를 투명하게 공개해요. 그러니 잡음이 덜 생깁디다.”

 

사랑의 희망은행 밴드에 들어가 보니 매일 수입과 지출을 올려 누구나 볼 수 있었다. 기관이 주도하는 봉사단체에는 사람들이 몰려간다. 생색도 나고 업적이 되니까. 이 단체는 현재 사회복지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가정이나 틈새에서 고통 받는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이런 태도가 봉사활동의 진정성이 아닐까.

 

 

- 괜찮게 살았던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

 

재경 강원도민 회장을 하던 그의 집에는 매주 지역신문이 배달되었다. 어느날 경산시립박물관 박물관대학 광고가 눈에 띄었다. 예상외로 역사 공부는 재미있었다. 특히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의 이야기가 그를 사로잡았다. 수료 후 경산의 문화를 알리고, 유적과 유물을 발굴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경산문화사랑회모임을 만든다. 박물관대학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타지에서 손님이 오면 김성택은 장독대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경산의 유적지를 안내한다고 한다. 자인의 계정숲과 압량의 마유지, 자인의 버들못(모형), 용산산성, 안심리 삼층석탑 등을 둘러보면서 역사와 의의를 설명한다. 고향이 경산인 나도 못하는 일을 김성택은 열정으로 하고 있었다. 그에게 경산의 제2의 고향이다.

 

경산으로 와서 살게 된 연원을 물었다. 김성택의 조부가 남산면 남곡동 용암사 주지를 지냈다고 한다. 청도에서 태어나 강원도로, 서울로, 대구로 인생유전을 거쳐 경산에 정착하게 된 인연은 스님이었던 조부의 공덕이 아닐까.

 

김성택은 사람이 모이면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를 인터뷰 인물로 선정한 이유는 신념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좋은 생각이나 신념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문제는 생활 속에서 좋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다. 신념을 실천하는 삶, 어렵고도 쉬운 일이다.

 

사람 좋아하는 그의 성격이 낳은 흥미로운 일화가 많았다. 군대를 제대하고 결혼을 한 그는 부모님과 신암동에서 같이 생활한다. 당시 철공소에 근무했는데, 한 달 월급이 오만 원이었다. 군대에서 인연이 닿은 졸병들이 휴가 나오면 한 달에 서너 명씩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밥 주고, 술 사주고, 기차표까지 끊어주었느니 부대원들은 휴가 정기코스로 김성택의 집을 다녀갔다. 손님을 치고 나면 가계부는 맨날 적자였다. 제대 후 삼년 동안 군인 손님이 왔다갔으니 말해 무엇하랴. 극진한 대접을 받고 간 이들에게 고맙다는 편지가 매일 집으로 왔다. 하루 사십 통까지 받았단다.

 


 

당연히 아내의 잔소리와 불만이 늘어났다. 그때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돈 해도 어디서 돈이 나오지도 않고 도둑질도 못하니 이해하라고!” 그의 아내 김동화는 그때부터 남편을 포기했는지도 모르겠다.

 

김성택은 그런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결혼 후 둘이 오붓하게 여행 한번 다녀오지 못했다. 식당일로 바빠서, 소 키우는 일 때문에 집을 떠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가 봉사자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배려와 이해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기를 원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냥 괜찮게 살았던 사람 정도로만 평가받아도 좋겠어요. 나를 보고 훌륭하다거나 존경한다는 사람은 부담스러워요. 그런 사람은 언젠가 슬그머니 사라지대요. 그런 사람에게는 존경할 필요 없이 그냥 같이 갑시다, 라고 말해요. 하하.”

 

김성택이 봉사단 총재로 있으니까 정계로 진출할거라는 의심을 하는 이들이 많다. 그는 단호하게 회원 중에 나 말고 누구라도 정치를 해도 괜찮다.”라고 선언했다. 나도 그에게 앞으로 정치 같은 것 하지 말고 봉사활동만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정치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봉사를 천직으로 여기는 사람은 귀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선행은 오병이어의 기적(예수가 한 소년으로부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취하여 오천 명의 군중을 먹였다는 기적)을 낳는다. 내 밥그릇도 지키기 힘든 경쟁사회에서 남을 위한 봉사를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택의 이웃사랑은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책상에 앉아 책으로 세상을 읽는 나와는 다른 차원의 삶 읽기였다. 봉사하는 이들의 특징은 돈이 아닌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문학의 가치와 닮았다. 모두 돈을 좇아가는 세상, 한쪽에서 내 욕망을 비우고 타인의 아픔을 메워주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살만한지도 모른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무실 근처 식당으로 가서 칼국수를 같이 먹었다. 식당 창문 너머로 연분홍 벚꽃잎이 바람결에 나부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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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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