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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도 사용설명서가 있다”
김홍신 소설가 경산 문학강연, 이야기 7마당 전문

기사입력 2018-09-10 오후 1:45:09

 



 


인생에도 사용설명서가 있다

 

김 홍 신

(소설가, 민주시민정치아카데미 원장)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현인들이 무수한 가르침으로 사람답게 사는 비법을 알려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생사용설명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전제품을 사면 사용설명서가 들어 있듯이 사람에게도 몸과 마음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려주는 설명서가 존재하지만 대부분 사용법대로 살지 못합니다. 사용법대로 사는 데는 특별히 돈이 더 들지도, 시간이 더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밤낮없이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내 몸을 위해 기름지고 비싼 음식을 먹기보다는, 소박하게 먹고 몸을 가볍게 하고 적절히 운동하며 웃고 즐기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영혼을 위해서는 늘 좋은 생각을 하고 남을 기쁘게 하며 세상에 보탬이 되고 행복에 겨워야 합니다. 인생사용법은 복잡하거나 불편하거나 지키기 어렵지 않습니다.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인생사용설명서를 갖춰야 합니다. 지금도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오늘부터, 우리에게 인생사용설명서가 있다면 거기에 무엇이라 적혀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인생에는 중요하지만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것과 눈앞에 바로 보이기에 빨리 얻기를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건강, 웃음, 사랑, 행복이 전자라면 돈, 명예, 권력 같은 것이 후자일 듯합니다. 그동안 미뤄왔지만 진정 추구해야 할 가치, 이제 중요한 것 먼저 선택합시다. 우리의 인생은 매우 소중하고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1장 당신은 누구십니까

 

1.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당신은 누구십니까?”

누군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바로 앞에 종이가 한 장 놓여 있다면 그 안에 빼곡히 채워 쓸 수 있습니까? 아마도 이름, 나이, 주소, 성별, 가족사항, 주민등록번호, 학력, 고향, 경력 정도를 밝히고 나면 다음엔 그다지 쓸 거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것은 생김새나 겉모습, 일상적인 것을 알기 위함이 아닙니다. 당신의 근원과 본질이 무엇인가 스스로 생각해 보기를 권한 것입니다.

, 다시 한 번 자신이 누구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말입니다. 육신은 해부하면 오장육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지만, 영혼은 해부할 수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정답이 있을까요? 아마도 명답은 있을지언정 정답은 찾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얼굴을 감출 수 있다면 서로를 어떻게 알아보겠습니까? 큰 종이에 이름, 주민등록번호, 이력, 가족사항 등을 주저리주저리 써서 붙이고 다녀야만 겨우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얼굴이 그대로 있더라도 국가 공인기관에서 부동산 가격을 책정하듯, 사람마다 가격을 매겨 가슴에 달고 다닌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얼굴부터 볼까요, 아니면 가격표부터 확인할까요?

사람의 가치가 다 똑같지 다를 리 있겠느냐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교통사고를 당하면 사람마다 보험료가 달리 책정되듯이 사회적 가치면에서 판단하면 서로 가치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 가격이 다른 것이지요.

사람들은 흔히 사회적 가격 때문에 열등감에 빠져 주눅이 들거나 자신감을 잃거나 갈등에 시달리곤 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사회적 가격이 낮다고 여기기 때문에 열등감에 빠지곤 합니다. 권력, 명예, 재물, 인물, 학연, 지연, 가족 등을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낮춰 보고 주눅이 들거나 보잘것없다고 자탄하곤 합니다.

진정 당신은 가격이 낮을까요?

지금 나의 가치는 과연 얼마쯤일까, 한번 계산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얼마 정도로 생각하겠습니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어쩌면 그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낮춰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서로에게 묻지는 마시고 그냥 속으로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그대로인데 상대가 변했다고 생각하기에 보이지 않는 갈등의 골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끌고 가는 사람, 끌려가는 사람

 

진주나 다이아몬드, 금 같은 보석들은 왜 값이 비싼 걸까요? 희귀한데다 잘 변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계 인구 67억 명 중에 영혼과 육신이 같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더 있을까요? 단연코 없습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으며 미래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한 사람입니다.

앞서 당신의 가치를 물었을 때, 대부분 자신을 별로 비싸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도 낮추어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도저히 가격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헐값으로 잘못 매긴 것입니다.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존재임에도 스스로 나는 그저 그렇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흉악범이 당신에게 흉기를 들이대며 목숨을 내놓든지 아니면 가진 재산을 모두 내놓으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재산보다 목숨이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할지도 모릅니다. 망설임 없이 전재산을 다 내놓을 만큼 우리 자신은 소중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평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열등감에 빠져있거나 주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열등감은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욕심은 두 가지 모순된 욕구를 한꺼번에 채우려는 데서 커지는 것이지요.

공부는 안 하면서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것, 노력도 안 하고 성공하려는 것, 잘 웃지 않으면서 푸근한 인상을 주려는 것,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받으려는 것, 밥은 많이 먹고 운동도 하지 않으면서 허리둘레 줄어들길 바라는 것, 이런 게 바로 욕심입니다.

 

특히 사회적 가격 때문에 주눅이 드는 것은 간절히 원하는데 이루어지지 않거나 갖고 싶은데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건 결코 나쁜 게 아닙니다. 하지만 가져서는 안 되는 걸 가지려고 하거나 갖기 어려운 걸 노력 없이 가지려 한다면 갈등에 휩싸이고 주눅이 들게 마련입니다.

소유하려는 욕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보다 많이 갖지 않아도 비교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이 더없이 존귀하기에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박하게 살면서도 만족하고 행복해합니다.

 

열등감에는 예방주사가 없습니다. 못나고 부족하고 무엇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강아지 목에 왜 목걸이를 채우는지 아십니까? 주인 마음대로 다루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끌려다니는 것은 스스로의 목에 목걸이를 채우고 슬퍼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세상의 주인으로 살겠습니까, 아니면 목걸이에 끌려다니겠습니까?

세상을 끌고 가는 사람은 스스로의 존엄함을 인정한, 자존심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세상에 끌려다니는 사람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주눅 든 사람입니다.

지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끌려다녔는지, 아니면 세상을 끌고 앞장서 갔는지 말입니다.

 

3. 행복의 기준

 

우리를 늘 끌고 다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 명예, 권력, 학연, 지연, 인맥, 비싼 집과 좋은 자동차, 내 뜻에 잘 따르는 가족과 내가 원하는 것들에 끌려다니지 않았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 100개 중에 한두 개만 이루어져도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90개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갈구해서 얻어지길 기대한다면 그게 바로 세상에 끌려다닌 것입니다.

, 명예, 권력, 비싼 집과 좋은 차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편리함과 여유로움을 주는 그런 것들이 없다면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것들이 행복의 척도가 아니며 인생의 가늠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은 부유한 사람들이 적게 가진 사람들보다 더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작 부자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돈이 엄청나게 많은 재벌 회장이, 명예가 드높은 유명인사가, 권력이 드세어 천하에 부러울 게 없을 듯한 고위인사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겠습니까?

사람들은 흔히 원하는 걸 갖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나보다 많이 갖거나 크게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며 속앓이를 합니다.

 

2장 왜 사십니까

 

1. 당장은 죽고 싶지 않은 이유

 

많은 사람들이 불교, 기독교, 가톨릭, 원불교 등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 중 혹시 지옥에 가려고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나 천당이나 극락에 가기를 바라지, 지옥에 가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당신의 손을 잡고 천당이나 극락에 데려다주겠다고 하면 곧장 따라가겠습니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절대 따라가지 않겠다고 할 것입니다. 죽으면 꼭 가고 싶은 곳인데 어찌 당장은 따라나서려 하지 않을까요?

천사가 손잡고 천당이나 극락에 가자고 한다면 곧바로 떠오르는 건 어떤 것들이겠습니까?

거창하고 장엄하고 숭고하고 황홀한 것들입니까? 산다는 것은 어슷비슷하지, 유별나거나 특별하거나 엄청나지 않습니다.

당장 천사를 따라가지 않는 건 할 일이 남았고, 아직 죽을 나이가 아니며, 가족이 있고, 희망이 있으며, 지금보다 나은 미래가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저뿐 아니라 사람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왜 사십니까?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고 차분히 생각해 보십시오.

힘겹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일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고, 사는 게 짜증나고, 갈등이 벅차고, 피곤하고, 외롭고, 몸도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것 같고, 세상을 둘러보니 나만 못난 것 같고, 남들과 비교하니 나만 초라하고`.

그럼에도 악착같이 살아 있고 지금 당장 천사를 따라가지 않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으리라는 가능성을 예견하기에 오늘의 고통과 힘겨움과 갈등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 희망을 풀어 말하면 행복이란 낱말이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어렵더라도 우리가 살 만한 것은 자신의 일에 열정을 바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기쁘고 또한 남을 기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보람 있게 살고 세상에 보탬이 되도록 열정을 바치는 것입니다. 열정은 곧 창의력이고 지혜이며 기쁨이자 보람이고 희망입니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줄까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내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잠시 기쁠 뿐입니다. 재산이 많고 권세가 높고 명예가 커도 기쁘고 행복하지 않은 것은 행복의 제조자인 자신이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이 든 어른들이 세월이 빠르고 인생이 덧없다고 말하는 것을 유심히 새겨들어야 합니다. 나이 든 게 아쉬워서 그렇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인생이 기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중국 고전에 인생이란 백마가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내다보는 것처럼 삽시에 지나간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젊어서는 인생이 꽤 길게 느껴지지만, 나이 들면 화살처럼 달리는 백마를 문틈으로 얼핏 본 것처럼 인생이 정말 빠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나이를 먹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월이 기다려줄 거라는 착각에 쉽게 빠지곤 합니다.

세월을 붙잡고 더디 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입니다. 즐겁게 사는 것이 세월을 더디 가게 하는 묘책입니다.

인생은 정말로 한 번밖에 살지 못합니다. 두 번 살 수 없습니다. 두 번 살 수만 있다면 한 번은 연습처럼 살겠지만 한 번밖에 살 수 없으니 살아 있는 동안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소중하기에 오늘이 생애 최고의 날인 듯 최선을 다해 살고 지금이 생애 최고의 순간인 듯 행복해야 합니다.

세상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나만큼 소중한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우주에서 오직 하나뿐인 존귀한 사람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기쁘게 웃을 수 있지만 스스로 보잘것없다고 여기면 세상에 즐겁고 기쁜 일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은 누리고 불행은 버리는 것입니다.

소망은 좇는 것이고 원망은 잊는 것입니다.

기쁨은 찾는 것이고 슬픔은 견디는 것입니다.

건강은 지키는 것이고 병마는 벗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끓이는 것이고 미움은 삭이는 것입니다.

가족은 살피는 것이고 이웃은 어울리는 것입니다.

자유는 즐기는 것이고 속박은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웃음은 나를 위한 것이고 울음은 남을 위한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인생에 대한 궁금증이 많게 마련입니다. 저도 중세 철학자들의 흉내를 내면서 우리 사회의 명망가들을 찾아다니며 인생에 대해 물은 적이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인생을 진지하게 산 어른들은 대부분 호방하게 살라고 했습니다. 정말 소문이 날 만큼 인생을 호방하게 산 어른들은 대체로 진지하게 살라고 충고했습니다.

저는 진지하게 사는 것과 호방하게 사는 문제를 가지고 다시 한 번 묻고 다녔습니다. 결국 얻어낸 결론은 진지함과 호방함을 함께 선택함이 현명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생을 진지하고 호방하게 사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지혜입니다.

 

2. 날마다 일어나는 기적

 

코를 꼭 쥐고 입을 열지 않은 채 얼마쯤 숨을 쉬지 않을 수 있는지 참아보십시오. 30초를 넘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숨을 쉬지 않고 참아보면 그제야 비로소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숨을 쉬려고 노력했습니까?

훗날 병원에 입원해서 산소호흡기를 끼고 숨을 쉴 때야 비로소 숨 쉬는 게 참으로 행복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이미 행복을 놓친 것입니다.

뛰는 맥박을 손가락 끝으로 느껴보십시오. 심장의 박동으로 온 몸 구석구석 실핏줄 끝까지 피가 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날마다 무수히 신비롭게 박동하고 있는 심장을 고마워했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기적을 일구고 있습니다. 심장이 멈추지 않고 숨이 끊기지 않는 기적을 매일매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아침에 눈을 뜨면 벌떡 일어나지 말고 20초 정도만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읊조리듯 말하십시오.

 

첫째, 오늘도 살아 있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둘째, 오늘 하루도 즐겁게 웃으며 건강하게 살겠습니다.

셋째, 오늘 하루 남을 기쁘게 하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서너 달만 해보면 자신이 놀랍도록 긍정적으로 변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물론 말로만 하면 자신에게 거짓말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말한 대로 실행하십시오. 그러면 잔병치레도 하지 않게 됩니다. 아픈 곳에 손을 대고 읊조리면 쉽게 낫거나 통증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지금의 자신을 면밀히 살펴보십시오. 내 육신을 학대하지는 않았는가, 마음을 들쑤시지는 않았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몸이 원하는 것 이상의 음식을 먹는 것도 학대이며, 몸이 요구하는 편안함을 거부하는 것도 학대이고,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는 것도 학대입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왜 사십니까?

불행하기 위해, 슬퍼하기 위해, 아프기 위해, 고통스럽기 위해, 짜증내기 위해 살아서는 당연히 안 됩니다. 행복하고 즐겁게 웃고 즐기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지금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그저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제 말이 옳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틀렸으면 가로저어 보십시오.

 

행복은 220볼트 전선에 감전된 것처럼 짜릿한 것입니까?

행복은 달나라보다 멀리 있어 다다르기에 너무 힘이 드는 것입니까?

행복은 온갖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들을 모아놓은 것처럼 화사찬란합니까?

행복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행복은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한없이 흥겨운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고 고개는 저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행복은 아주 짜릿하고 멀리 있으며 화사찬란하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기가 막히게 신나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묻겠습니다.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부분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고 대답하지만, 실제로는 마음 밖에서 행복을 찾고 있었습니다. 행복은 지금 내 마음에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숨을 쉬면서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까?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숨 쉬며 살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지금 죽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으로 가면서 당신은 무엇을 가져갈까요? 따라와 줄 사람이 있을까요? 과연 가져갈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가져갈 수 없는 건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 사용하고 돌려줘야 할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평균 수명만 믿고 자신이 80세까지는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크나큰 오산입니다. 그때까지 살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80세 전에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내 인생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에 행복해야 합니다.

 

3장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1. 깨어 있는 영혼

 

내 인생은 누구의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당신은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당연히 내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얽매여 살지는 않았는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전거를 처음 탈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전거는 바퀴가 두 개뿐이어서 저 홀로 설 수 없고 페달을 돌려야만 넘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뒤에서 잡아주면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고 뒤를 잡아주던 사람이 손을 놓아도 놓은 줄 모르면 한참을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혼자 달린다는 걸 아는 순간 놀라 넘어지게 됩니다. 다치는 게 두려워 계속 의지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자전거를 탈 수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과 육신의 두 바퀴를 굴리며 저 너른 세상을 달려가려면 자기 인생은 자신이 조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으려면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적절히 돌려야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많이 돌려서도 적게 돌려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몸과 자전거가 균형을 유지할 만큼만 돌려야 합니다.

 

개인의 자존심이 높아지면 좌우가 두루 편안해집니다. 민족과 국가의 자존심이 높아지면 인류애가 두루 통용되어 세상이 평화로워집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드높이자는 것은 결국 내 영혼을 흔들어 깨워서 나와 이웃과 세상이 화평하고 서로 보탬이 되자는 뜻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동남아 지역으로 여행을 가면 그 나라 말을 몰라도 큰소리를 칩니다. 음식점이나 가게에 들어가서 어이, 이거 빨리 가져와”, “이거 얼마야?”라고 우리말로 묻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에 가면 주는 대로 먹거나 눈치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남아에 가서는 우리가 더 잘산다는 자부심에 기가 살지만, 선진국에 가서는 언어와 생김새에서부터 주눅이 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동남아에서는 내가 너희보다 우월하다는 자존심에서 그렇게 당당하고, 서양에서는 내가 그들보다 못하다는 열등감에 자신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존심은 스스로 존엄하다는 걸 인정하고, 자신이 존귀하듯 나 아닌 다른 모든 것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은 자만심입니다.

 

길을 가다가 외국인이 말을 시키려고 다가오자 얼른 쇼윈도를 향해 돌아서서 피하는 학생에게 제가 말했습니다.

미국에 가서 영어를 못 해 길을 헤맨다고 미국 정부를 탓할 수 있겠느냐, 미국 사람을 탓할 수 있겠느냐? 피하면 안 된다. 영어를 열심히 배워서 길을 잘 일러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외국인에게 활짝 웃으며 ! 한국말 좀 배워라라고 말할 뱃심이 있어야 한다.”

미국인들은 한국말을 몰라도 기죽지 않는데 우리는 왜 영어 못 하는 걸 부끄럽게 여길까요? 주눅이 들었고 역사를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국, 일본, 미국으로 인해 아픔을 경험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기억을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세상의 중심은 누구입니까?

바로 당신이어야 합니다. 당신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 자존심이 곧 당신의 영혼입니다. 자존심에 상처가 생기고 일그러지면 주눅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주눅이 들었다는 것은 영혼이 누워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누구든 당신의 영혼에 누워 있으라 한 적 없고 주눅 든 채 살라고 명한 적 없습니다. 당신 스스로 주눅이 들고 누워버렸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벌떡 일어서야 합니다. 영혼을 들쑤셔 깨워야 합니다. 초롱초롱한 영혼으로 천하를 살펴보는 큰 가슴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심은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며 나 아닌 모든 것도 귀하게 여기고 행하는 것입니다. 나만 귀하다고 여기는 생각과 행실인 자만심과는 완연히 다릅니다.

사랑, 용서, 베풂, 희망이 모이면 곧 자존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사람다운 정신이 자존심입니다.

 

4장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세상 모든 것과 더불어 사는 법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바로 더불어 사랑때문인 듯합니다. ‘더불어 사랑은 나를 사랑하듯 나 아닌 모든 것을 사랑하고 아끼는 정신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게 가장 잘 사는 방법이지 않을까요?

옷감은 실이 가로세로로 얽어매어져야 제 구실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실일 뿐입니다. 강한 밧줄이나 질긴 옷감을 살펴보면 재료가 서로 꼬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집에서 흔히 사용하는 바느질용 실은 어린아이도 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실을 열 겹이나 스무 겹 정도 꼬아놓으면 장정들도 끊기 어렵습니다. 백 겹쯤 꼬면 자동차도 끌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건축자재 중 하나인 합판을 살펴보십시오. 톱밥과 접착제를 섞어 규격대로 찍어 말린 다음 그것들을 가로세로로 겹치면 원자재인 나무판보다 훨씬 강해집니다.

 

사람들에게 싫어하는 동물을 적어보라고 하면 대체로 뱀, , 바퀴벌레, 지렁이, 모기, 파리, 흰개미 등을 나열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바람대로 이런 동물들이 단번에 지구에서 사라진다면 정말 편하게 살 수 있을까요?

만일 뱀이 모두 없어진다면 들쥐들이 극성을 부려 큰 피해가 생길지 모릅니다. 또한 쥐가 모두 없어진다면 생태계의 한 축이 무너져서 천적인 여우 같은 짐승이 수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또한 모기가 사라진다면 모기유충을 먹고 자라는 잠자리를 구경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2억 년 전에 생긴 지렁이 덕분에 땅 속 공기의 양은 30퍼센트, 물 저장능력은 20퍼센트나 높아진다고 합니다. 사실상 지렁이가 땅 속의 트랙터이자 비료공장이며 다목적 댐인 셈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무가 내뿜는 산소를 마시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지렁이는 쓰레기를 먹어치워 흙을 깨끗이 해주고 분변을 내놓아 땅을 기름지게 하기 때문에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데도 훌륭한 역할을 합니다. 이런 지렁이가 감쪽같이 사라진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지렁이가 사라지면 인류는 오래지 않아 멸망할지도 모릅니다.

만일 해충인 흰개미가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흰개미가 목재를 사정없이 갉아먹어 건물이 무너지게 되거나 우람한 나무가 갑자기 쓰러지는 일 같은 건 발생하지 않겠지만 또다른 문제가 일어날 겁니다.

미국 에너지부 산하의 합동게놈연구소와 캘리포니아 공대 연구실은 흰개미의 내장 속에 들어있는 미생물들이 에탄올을 생산해 낸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랄 수 있는 화석원료를 대신할 그린 에너지를 흰개미에게서 발견한 것입니다. 흰개비 덕분에 지구환경의 미래에 큰 희망을 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무를 갉아먹은 흰개미는 수소, 메탄, 이산화탄소 등을 배출하는데, 이 과정을 에너지 효율로 따지면 무려 90퍼센트나 된다고 합니다. 더구나 흰개미가 종이 한 장을 먹고 배출하는 수소는 2리터나 되며, 이 양은 수소연료자동차를 10킬로미터나 달리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획기적인 청정에너지가 등장하여 지구 파괴를 멈추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바로 해충으로 규정했던 흰개미 덕에 말입니다.

우리는 또 독감 바이러스를 비롯한 잡다한 병균들이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에게 유익한 미생물만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 종류의 미생물들이 우리와 더불어 살고 있기에 병균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면역력이 생기고 생명을 존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익한 미생물이라 하더라도 자칫 돌연변이라도 일으킨다면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릅니다.

사람에게는 유해하지만 다른 장소에서는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미생물도 많습니다. 사람에게 유익한 미생물만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유해한 미생물이 사라지면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모두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하물며 사람임에랴!

 

2. 인간의 향기

 

혹시 인간의 향기를 맡아본 적이 있습니까?

몸은 향수를 뿌리거나 향내 나는 물건을 소지하면 상대에게 좋은 향기를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은 쉽게 향내를 맡기 어렵습니다. 영혼의 향기는 영혼으로만 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몸에서 악취가 나면 다른 향을 느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혼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다른 영혼의 향기를 맡을 수 없습니다.

한 번 떠올려보십시오.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향기를 맡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첫사랑일 수도 있고 짝사랑했던 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상대가 행복해서 눈시울을 붉혔던 순간이거나 그의 뜨거운 사랑을 느꼈을 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떠올려보십시오. 진정으로 그가 향기로울 때는 언제였습니까? 인간애를 발휘하거나 어려운 이를 돕거나 고통스러워하는 누군가를 거들어주거나 아픈 이를 지극히 보살필 때이지 않았습니까?

자비는 다른 이의 고통을 해결해 주려는 심성이고, 자애는 다른 이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건 자애이고, 아픈 이를 조건 없이 보살피는 건 자비입니다. 바로 자애와 자비를 행하는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가 가장 크게 느낄 수 있고 가장 멀리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복은 받는 것이고 덕은 베푸는 것이라고 합니다. 베풂의 진정한 의미는 조건 없이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보상을 바라거나 고맙다는 말을 기대하는 것은 덕을 베푸는 게 아니라 거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베푼 사람들과 욕심껏 갖기만을 원한 사람들의 말로를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과 독립투사들은 베푼 인물들이기에 존경을 받지만, 친일파들, 역대 대통령들과 가신들은 힐난을 받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거나 많이 가지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베푼 사람은 승리자가 되고 빼앗은 사람은 패자가 되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더 깊이 세상을 살펴보면 부드러운 것이 강한 걸 이기고 기쁨이 슬픔을 이기고 희망이 좌절을 이기고 베풂이 욕심을 이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5장 누구와 함께하겠습니까

 

1. 인생의 마중물

 

상수도 시설이 좋지 않던 시절에는 지하수를 끌어올려 사용하는 펌프라는 게 있었습니다. 지렛대 같은 손잡이를 위아래로 계속 움직여야만 땅 속의 물을 퍼올릴 수 있는 기구입니다.

그러나 그냥 펌프질을 하면 물을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물을 한 바가지쯤 부어야 관 속에 물이 차서 지하수와 연결되고 그때 펌프질을 하면 물이 따라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그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손님을 마중한다할 때의 바로 그 마중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을 얻기 위해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필요하듯 우리 인생도 무엇인가를 원한다면 마중물을 부어야 합니다. 상수도 시설이 아무리 잘되어 있어도 수도꼭지를 틀어야 물이 나오듯 내 수고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이 변하고 상대가 변하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변하기를 고대합니다.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하루에 오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걱정, 근심, 불안, 화 따위이고 희망, 사랑, 기쁨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내가 먼저 변하면 상대와 세상이 변하지만 상대와 세상이 변하기만을 바라면 오만 가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변한다는 건 바로 내가 마중물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먼저 쏟아부으면 마실 물이 콸콸 쏟아지게 마련입니다.

물론 혼자 힘으로 이겨낸 사람도 없지 않지만 성공한 사람의 대부분이 누군가의 도움과 조언과 충고를 받았다는 걸 떠올려보면 인생살이에서는 남에게 도움받을 길을 늘 열어두어야 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충고와 도움은 대체로 인연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인연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정성과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돈과 지위, 명예로 쌓은 인연은 명예와 지위와 돈을 잃었을 때 사라지는 특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연은 참으로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스치는 미소 한 번으로, 상대를 칭찬하는 말 한마디로, 좋은 얼굴로 반기는 표정에서, 슬플 때 위로하고 기쁠 때 박수 쳐주는 것으로 시작되기도 합니다. 칭찬도 위로도 박수도 베풂입니다.

 

인생을 잘 살려면, 첫째 지혜로운 스승을 만나야 하고, 둘째 어려울 때 함께할 수 있는 벗을 사귀어야 하며, 셋째 다사로운 동반자를 두고, 넷째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바쳐야 합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큰 스승을 만나려면 배움의 자세가 확고하고 모진 가르침을 따를 각오가 남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참스승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유명하거나 현자로 소문난 스승이 내게도 반드시 참스승인 것은 아닙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참스승은 도처에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서도, 나무 한 그루,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에서도, 인생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보면 세상이 모두 스승이 됩니다. 공자는 자신을 포함하여 세 사람이 모이면 두 사람은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왼쪽에 있는 나쁜 사람을 보고 따라하지 않으면 그가 스승이요, 오른쪽에 있는 좋은 사람을 보고 따라할 수 있으면 그도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스승은 도처에 있으며 내가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내 가슴과 생각과 영혼이 열려야 합니다. 마음이 닫히면 참스승은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또한 내게 참다운 벗이 있는지 세심히 살펴야 합니다.

 

참다운 벗을 만나려면 세속적 이익과 덕을 보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벗의 장점을 높이 사고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허물을 충고하고 따스하게 덮어주어야 합니다. 마치 연인을 대하듯 다독이며 사랑해야 합니다. 벗을 즐겁고 재미있게 해줄 줄 알아야 합니다. 벗이 필요하다고 할 때 곁에 있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얼음은 차가운 물을 부으면 잘 녹지 않습니다. 뜨거운 물을 부어야 잘 녹습니다. 뜨거운 물은 사랑이고 배려이고 베풂이고 나눔이고 어울림이고 동행이고 감사이고 기쁨입니다. 뜨거운 물이 될 수 있어야 진정한 벗을 얻습니다.

 

상대가 내 수준에, 내가 원하는 만큼, 내 생각대로 존재하기를 기대하면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상대가 내 생각과 내 방식과 내 뜻에 따르기만을 바라면 반드시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과 갈등의 골이 깊어집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느 학자의 견해처럼, 옷깃이 스치려면 두 사람이 끌어안아야 합니다. 한복의 옷깃은 턱 아래쪽의 쇄골과 흉간(胸間) 부분에 있으니 두 사람의 옷깃이 닿으려면 가볍게 껴안는 것으로는 힘듭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인연이란 단순히 스치는 사이가 아니라 옷깃이 맞닿을 정도의 친숙한 관계를 뜻했던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가장 다사로운 동반자입니다.

부부싸움에서 이긴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져줄 수 있는 용기가 진정한 승리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찌 세상살이에 늘 이기기만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질 때가 훨씬 많은 게 세상사입니다. 그럴 바에야 그냥 지지 말고 멋지게 져주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수없이 듣던 져주는 게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씀의 진정한 뜻을 이제야 알아차리게 됩니다.

 

6장 지금 괴로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1. 미움을 포기하는 법

 

용서는 이러저러한 조건 없이 그냥 관대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용서하는 게 진정한 용서이며 단서가 붙는 건 상대적 용서입니다. 상대가 빌고 반성하고 사죄하기를 기다리는 건 계산된 용서입니다. 용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생각하고 계산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만 용서하면 진정한 용서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를 용서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하기 싫은데 상황 때문에 용서했다면 스스로 잘 벼린 칼로 상처를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법적으로 고소하지 않고 그냥 참기로 했을 뿐입니다. 형식적인 용서로는 행복감을 맛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원망하게 되어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영적인 용서입니다. 영적인 용서를 하면 그 과정에서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됩니다. 참으로 행복하고 편안하고 자유로워집니다. 용서하는 게 억울하고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증오의 고통이 얼마나 자신을 망가뜨리는가를 안다면, 정말 용서하기 어렵다면 그냥 잊어버리는 게 내 영혼을 위하는 길입니다.

용서는 강자의 논리입니다. 어린아이가 내 뺨을 때리면 이 노옴!’ 하고 야단치는 걸로 끝내야지 버릇을 고친다며 어린아이의 팔목을 비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이 내 발을 밟고도 그냥 지나치면 불러세워 야단을 치게 마련입니다.

뺨을 때린 어린아이의 행실을 덮어줄 수 있는 건 용서입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사람은 진정한 강자입니다. 육신의 강자는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정신의 강자는 용서로 해결하고 웃습니다.

 

()’에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가다듬는 추서(推恕)’가 있고 남에게 관대한 용서(容恕)’가 있습니다.

스스로를 용서하려면 자신의 잘못을 먼저 알아차려야 합니다. 잘못에 대한 진솔한 반성을 한 뒤에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진정 추서입니다. 추서와 용서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결코 쉽지 않지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버릇이 되면 참으로 행복해집니다.

용서는 내 기쁨이 분명합니다. 미움과 분노와 증오는 쏜 사람에게 반드시 되돌아와 꽂히는 독 묻은 화살 같아서 나를 해코지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용서는 내 영혼을 평온하게 하고 가슴을 주욱 펴게 하며 나를 향기나게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애써 사랑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미운 사람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미움을 포기할 수는 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듯 버리십시오.

산을 오르거나 다리를 다쳤을 때는 지팡이를 짚어야 편합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거나 다리가 완쾌되었을 때는 지팡이가 오히려 귀찮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꼭 필요하던 것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쓸데없는 쓰레기를 왜 가지고 있습니까?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분노하고, 싫어하는 것은 영혼의 쓰레기입니다.

혹시 음식물 쓰레기를 안방이나 침실에 두는 사람이 있을까요? 돈 주고 산 귀한 음식물도 버리면서 마음속에 있는 영혼의 쓰레기는 왜 쌓아둡니까? 버리면 내가 행복해집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영혼의 쓰레기를 그냥 끌어안고 사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 그 괴로움의 근원을 한 번 면밀히 살펴보십시오. 괴로움의 원인이 상대방 때문입니까? 상대가 내 마음을 긁었고, 상대가 내 속을 뒤집었고, 상대가 시비를 걸거나 욕을 하거나 비위를 상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게 우선 편하긴 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의 심사를 어지럽혀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한번쯤 생각해 보십시오. 상대가 내 마음을 어지럽힌 것은 내 영혼을 깨끗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이 세상에 용서가 없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 살아 있겠습니까? 살아 있더라도 평온하겠습니까? 겉으로 평온하더라도 괴로움이 쌓여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관대함과 도움 그리고 배려로 수없이 용서받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용서받기를 원하면서 다른 사람은 용서하지 않고 그 때문에 괴로워합니까?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으면 평생을 그 사람에게 얽매여 사는 꼴이 됩니다. 용서하기 싫으면 잊어버리십시오. 미움과 분노는 가시와 같습니다.

 

2. 영혼에 박힌 가시

 

눈을 감고 10분만 가만히 앉아 있어보십시오. 오만 가지 생각이 다 얽히고설킬 것입니다. 그런 걸 번뇌 망상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번뇌와 미래에 사로잡히는 망상은 걷어내고 걷어내도 연방 머리를 내밀곤 합니다.

쓸모없는 것, 나를 괴롭히는 것, 내 영혼을 갉아먹는 것은 자꾸 뽑아버려야 합니다. 꽃밭이나 잔디밭을 곱게 가꾸려면 잡초를 뽑아내야 하듯 우리의 마음밭을 편안하게 하려면 영혼의 가시를 아낌없이 뽑아내야만 합니다.

100세가 된 현역 최고령의 한의사는 매일 오전 9시에 출근하여 오후 7시까지 맥을 짚고 침을 놓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무병장수의 비결을 어찌 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첫째,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둘째, 남의 허물을 잊고 용서하며

셋째, 소식(小食)하고 운동하라.

 

() 한의사의 말 속에 따스한 진실이 스며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잊어버리거나 그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는 것은 나의 영혼에 박힌 가시를 제거하는 마음가짐입니다.

 

7장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겠습니까

 

1. 깨달음을 얻은 날

 

인생은 결코 평탄치 않습니다. 수없는 좌절과 고통과 갈등이 똬리를 틀고 앉아서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곤 합니다. 한세상을 잘 살았다고 널리 알려진 사람들의 자서전을 보면 모두 고통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때 고통스러움에 밤잠을 설치고 세상을 원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돈과 권력과 명예 중에 고르라면 당연히 명예를 선택할 텐데 젊은 시절엔 명예를 더욱 각별히 생각했습니다. 그때의 제 괴로움의 원인은 명예가 손상되는 것에 대한 고통이었습니다. 명예를 잃으면 세상을 잃는 줄 알았습니다.

그 무렵, 당시 조계종 종정이던 성철 대선사의 상좌 중에 한 스님이 종정스님을 뵈러 간다며 저의 괴로운 사연을 물었습니다. 저는 가슴을 열어 아픈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며칠 후 종정스님을 뵙고 온 그 스님이 저를 다시 불렀습니다. 종정스님한테 제 사연을 고했더니 빙긋 웃으며 이런 말씀을 전하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제가 평생 잊지 못하는 성철 대선사의 말씀은 이랬습니다.

 

대나무처럼 살라!

처음에는 대나무처럼 살라는 성철 대선사의 화두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상좌스님의 자상한 설명을 듣고서야 저는 무릎을 쳤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대나무가 가늘고 길면서도 모진 바람에 꺾이지 않는 것은 속이 비었고 마디가 있기 때문입니다. 속이 빈 것은 욕심을 덜어내어 가슴을 비우라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사람마다 좌절, 갈등, 실수, 실패, 절망, 아픔, 병고, 이별 같은 마디가 없으면 우뚝 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욕심을 채우고 또 채우면 결국 막다른 골목에 홀로 서 있게 됩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틈이 있어야 비집고 들어갈 수 있으며 빈자리가 있어야 누군가 앉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대나무 마디처럼 온갖 고뇌를 딛고 자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릅니다. 복잡한 세상을 사는 사람이 어찌 고뇌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대나무에 마디가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 자라지 못해 모진 바람에 꺾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그 고뇌는 우리의 멘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뇌가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주고 미래를 개척해 주며 우리에게 살아갈 만한 가치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마도 즐기고 좌절과 아픔도 벗하며 슬픔과도 어우러져 살 줄 알아야 합니다.

흔히 듣는 말 중에 현대의 금언과도 같이 여겨지는 것이 있습니다. 암을 미워하지 말고 벗 삼아 함께 살아가라는 전문가들의 조언입니다. 처음에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참으로 낯설기만 했습니다. 암을 이겨내야지 어찌 벗 삼아 함께 살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전문가들이 조언한 참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암을 미워하면 원망이 생기고, 그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암세포를 키운다고 합니다.

육신은 마음을 따라간다는 게 정설이 되었습니다. 암을 이겨낸 사람들은 암을 두려워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벗하여 살았다는 게 과학자들의 연구결과였습니다.

 

세상은 늘 어렵습니다. 경기가 좋을 때는 그늘진 곳의 사람들이 어렵고 경기가 나쁠 때는 중산층까지도 고통스러워합니다. 어쩌면 많이 가진 사람과 크게 누리는 사람은 욕심이 많기에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지도 모릅니다.

그때 욕심을 내려놓으면, 그때 꿈에서 깨어나면, 그때 너털웃음을 웃을 수 있다면 당신은 악몽을 깨뜨린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맹자를 보면 품격 있게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 어짊의 실마리로 남을 측은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둘째, 의로움의 실마리로 세상살이를 하며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셋째, 예의의 실마리로 사양할 줄 알고 늘 겸손한 태도를 갖는 사양지심(辭讓之心).

넷째, 지혜의 실마리로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할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

남을 측은히 여기는 어짊이나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의로움, 사양하고 겸손한 예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혜 가운데 그 어디에도 혼자 누리고 많이 갖고 받으려고만 하는 욕심은 없습니다.

 

2. 행복에 이르는 일곱 가지 방법

 

희망은 정말 공짜입니다

태양이 찬란해 보이는 것은 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둠이 없고 찬란한 태양만 있다면 사람들은 진저리를 낼 것입니다.

희망은 좌절, 실패, 슬픔, 불행, 고통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통해 더욱 선명해집니다. 희망은 인간에게 태양과 같은 것이고 인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기적입니다. 기적은 희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희망은 억만금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희망은 공짜입니다. 마음만 활짝 열면 말입니다.

성공한 자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선 사람이고, 실패한 자는 자신의 콤플렉스에 주눅 든 사람입니다.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람은 행복해지고 실패에 무너지는 사람은 불행해집니다.

희망을 놓치면 우울증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를 입증하는 실험이 있습니다.

쥐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첫째 그룹은 한 시간 내내 자극을 주고, 둘째 그룹은 자극을 주지 않았으며, 셋째 그룹은 자극을 주다가 멈추기를 반복했습니다.

실험 결과 우울증에 걸리는 순서는 첫째, 둘째 그룹이었다고 합니다. 첫째 그룹은 자극 때문에 희망을 잃었고, 둘째 그룹은 무위도식에 취해 희망을 꿈꾸지 않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결국, 셋째 그룹만이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그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자극을 받아 괴롭지만 얼마쯤 지나면 편안해질 것을 믿기에 쉽게 우울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믿음은 곧 희망입니다. 인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괴롭히고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는 자극들이 무수히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자극들이 나를 강하게 만들고 건강하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드는 디딤돌이 됩니다.

 

삶의 자세 일곱 가지

 

그 어느 것도 절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두 희망찬 것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일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일곱 가지 방법을 제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웃으며 즐겁게 살자

10분 동안 웃고 사랑하면 10분 예수님, 10분 부처님이 되지만 10분 동안 찡그리고 미워하면 10분 악귀, 10분 마귀가 됩니다.

 

2. 소박하게 살자

내가 먼저 절약해야 합니다. 소박하게 먹어 몸을 가볍게 하고, 소박하게 생각하여 영혼을 편케 해야 합니다.

 

3. 나누며 살자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다른 사람이 원하는 걸 들어줘야 합니다. 복을 지어야 덕을 보게 됩니다. 나누면 나와 이웃과 세상이 행복해집니다.

 

4. 감사할 줄 알자

지금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지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숨 쉬고 생각하고 울고불고하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5. 희망을 갖자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되느냐고 물으면 물이 된다고 하기보다는 봄이 온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은 사람이 가진 최고의 자산입니다.

 

6. 재미있게 일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자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합니다.

 

7. 보람 있게 살자

웃고 즐기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며 남을 기쁘게 하면 절로 보람 있게 살게 됩니다.

 

웃으며 즐겁게 사는 사람은 참으로 멋스럽고, 소박하게 사는 사람은 진정 건강하며, 나누며 사는 사람은 덕을 짓는 자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겸손하여 복을 받고, 희망을 갖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로우며, 재미있게 일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은 아름답게 성공한 자이며, 보람 있게 사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자입니다.

희망은 결국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가장 사람다운 징표입니다.

 

최상룡(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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