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전시관
- 글
풀 / 김수영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18-11-24 오전 10:09:15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르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 원시인님,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느 시대보다 더 복잡하고 혼란한 기류 속에 사는 현대인에게 인간다움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혹시 잘못된 질문인가요? 그러나 우주의 법칙이 있듯 인간의 법칙도 있겠지요?
오늘은 1960년대 가장 인간답게 고민하고 인간답게 자유를 구가한 김수영 시인을 만나보고 싶군요. 그 중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풀’을 쓰다듬어 봅니다. 이 작품은 문학적 함축성을 많이 내포하고 있어 그 어느 작품보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작품이지요. 시는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독자들에게 수많은 의미로 재해석되고 재창조의 과정을 거칠 때 제값을 발휘하는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하고 명쾌하여 언제나 읽어도 시인의 그 정신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 훌륭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시는 짧은 언어예술이므로 그 예술의 창조성 측면에서 던지는 말입니다. 만약 한 작품이 독자들에게 가서 각자 새로운 의미로 재생산 된다면 그것은 생산된 만큼 새로운 작품을 양산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앰비규어티(ambiguity) 즉 애매모호성을 지닐 때일 겁니다. 애매모호성은 오늘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너무나 골몰에만 빠지게 만드는 난해함과는 다릅니다.
김수영의 풀은 어쩌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만 그 내용의 함축성 때문에 그 의미는 단일하지 않게 이해되고 있습니다.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하기에 따라 의미가 아주 다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풀과 바람과의 관계성을 통한 풀의 행위를 노래한 이 시는 인간존재의 삶의 근원적 속성을 노래했다고 보입니다. 인간 존재는 어쩌면 불어오는 바람 앞에 어쩔 수 없이 누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초연하게 자신을 내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절망하며 일어나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니체의 초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인간 존재 앞에 놓여 있지만 무기력하게 모든 걸 포기하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다시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눕혀 다시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게 하려는 의지를 보입니다. 이 의지야말로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진정한 자유정신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럴 때 동풍은 나(풀)를 억압하는 존재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동풍에 나부끼는 풀로서 동풍이 가져다주는 비를 온몸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여기서의 풀은 온실 속의 풀이 아니라 비바람 부는 들판에 자생하는 풀입니다. 자생이란 자기 주체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은 주체를 억압하는 존재일수도 있고, 주체를 살리는 존재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체가 타자에게 굴복하지 않고 바람에 몸을 맡기면서도 일어선다는 데 있습니다.
김수영은 1960년대를 그렇게 산 증인이었습니다. 그의 부인 김현경 여사의 ‘김수영의 연인’이라는 글에서 “문학은 어차피 각질화 된 제도에 저항하는 양식이 아니던가.”라고 한 것은 그의 삶과 문학 정신을 한 마디로 요약한 울림으로 귓가를 내내 맴돌게 합니다.
.jpg)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jpg)
.pn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