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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19-11-18 오후 4: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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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 오탁번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19-01-19 오전 10:04:30





폭설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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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시인님, 욕설도 이렇게 재미있는 시가 될 수 있다니…. 한겨울 방 안에 앉아 내리는 눈을 보며 마음의 폭설을 만끽하고플 때, 이 시를 만난다면 겨울밤도 참 따뜻하리라 생각해 봅니다.

 

남도 땅 어느 외진 동네가 그려지고 이른 아침 확성기를 통해 이장의 방송이 들리는 듯합니다. 전라도 사투리의 구수한 욕설을 섞어 동네 사람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눈을 치우고 잔 밤 또 눈이 수북이 내려 다음 날 아침 또 이장이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하고 방송합니다. 눈을 치우고 소주를 마시고 잠이 든 다음 날 아침, 더 많은 눈을 본 이장이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하는 말에 독자는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욕설도 상황에 맞으면 욕에서 끝나지 않고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은 눈 내림의 점층화와 욕설의 점층화를 대비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폭설의 세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두렵거나 걱정거리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면서도 포근한 겨울 눈 세상에 젖게 합니다. 이는 욕설이 가지는 미학성과 3연에서 보여주는 성적인 미학성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라는 구절을 통해 낮에 그 힘들었던 고단함이 밤에는 각자 아내의 품에서 그 고단함을 풀고 있다는 상상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눈에 파묻힌 세상이나 아내의 치맛자락의 품에 파묻힌 세상이나 상통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시인님, 오늘밤 혹시 눈이라도 내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창문으로 다가가 봅니다. 아파트 화장실문을 모과빛 장지문으로 바꿔 달아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창문으로 김이 서린 30대의 아내의 실루엣이 비칠지 모르잖습니까?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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