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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과 잠자다 / 박방희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19-03-16 오전 9:35:47





복사꽃과 잠자다

                                                                    박방희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어느 골짜기에 이르러 난데없이 환한 복사꽃나무를 만났습니다 오래 전부터 서 있었으나 아무도 보는 이 없이 혼자 꽃피고 지기를 거듭했을 그 나무, 올해도 안심하고 알몸으로 환하게 꽃피어 있다가 나에게 들킨 것입니다 순간, 꽃들이 화들짝 놀라며 온 몸에 두드러기라도 인 듯이 붉어졌습니다 더 환하고 향긋한 꽃빛 바람이 일었고 수천 송이 꽃들은 불 켜진 듯 밝았습니다 크고 작은 벌들 붐빔 속에서 무슨 천상의 음악 같은 것이 하늘의 가락으로 흐릅니다 나는 꽃그늘에 앉아 빛과 향에 취해 혼곤한 잠에 빠지고 붕붕거리는 금빛 벌이 되어 꽃 속으로 날아들었습니다. 복사꽃 한 송이 송이가 얼굴을 갖고 있어 저마다 나를 보고 웃습니다 나는 방실거리는 꽃 하나하나에 입 맞추었는데 그때마다 달콤한 꿀이 입안으로 들어와 술 취한 듯했습니다 꿈속에 또 꿈을 꾸었는데 족두리 쓴 신부가 혼례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방긋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기다린 지 백년이 되었어요. 올해도 그냥 저무나 했는데 낭군께서 오셨으니 이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다.” 옷깃에 스미는 바람이 서늘하였습니다 눈을 뜨니 어느 새 산그늘이 내리고 해님도 산 너머로 숨었습니다 정신을 수습하여 산을 내려오는 동안 깜깜하게 혼자 저물어야 할 나무 생각에 몇 번인가 뒤돌아보았습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왔습니다 다시 그 산에 올라 헤매다 그 나무 만났습니다

치렁한 가지마다 올망졸망 매달려 어미젖을 빨고 있는 앙증스런 열매들 보았습니다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마치 핏줄을 만난 듯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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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시인님, 올해는 봄도 이른 것 같습니다. 오늘은 봄기운 완연한 복사꽃 이야기 한번 해 보고 싶군요.

 

예부터 복사꽃이 핀 곳을 도화원(桃花園)이라고 한다지요? 중국의 시인인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나오는데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고 이상적인 낙원인 셈이죠. 유토피아로서 동양에서는 인간 삶의 종착지 역할을 해 온 곳이기도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새봄 복사꽃이 만발한 곳에 가면 환한 기쁨으로 충만해진 얼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시에서 우리는 이런 기쁨의 순간을 넘어 복사꽃과의 상상적 일체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시의 화자는 어느 날 산속에서 길을 잃고 화사한 복사꽃을 만납니다. 너무나 황홀한 나머지 그곳에서 잠이 들었고 그리고 꿈속에서 복사꽃과 사랑을 나눕니다. 꽃잎과 벌들의 입맞춤처럼 그렇게 한나절을 보내고 서늘한 기운에 잠이 깨어 아쉬운 이별을 하고 내려옵니다. 시의 화자는 계절이 바뀌어 다시 찾은 그 산에서 올망졸망 매달린 복숭아 열매를 만납니다. 그런데 시의 화자에게는 앙증스런 이 열매가 어미젖을 빨고 있는 아기로 보이고 순간 핏줄을 만난 듯’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원시인님, 이런 외도라면 기꺼이 한번 해 볼만 하지 않나요? 시인의 야릇한 시적 상상력이 빚은 세계에서 우리는 잠시 눈을 감고 감미로운 무릉도원을 떠 올려 봅니다. 자신이 벌이 되어 복숭아꽃과 입 맞춰 봅니다. 인간의 에로스와 이상향의 만남이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복숭아꽃잎이 가지는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숭아꽃잎의 그 발그레함, 꽃잎의 모양 그리고 복숭아의 탐스러운 곡선 등은 예로부터 여인을 상징하였지요. 에로스적 사랑과 인간의 이상적 공간 사이에 놓인 복사꽃과의 만남에서 원초적 핏줄까지 만남은 순간 저릿함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습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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