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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19-04-26 오후 5: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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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견디기 힘든 / 황동규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19-04-06 오전 7:01:45





, 견디기 힘든

                            황동규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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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님,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이 무엇인가요? 알아듣기 힘든 추상적인 그러나 그곳에 뭔가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을 안고 오늘은 황동규의 시 , 견디기 힘든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시인은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을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이 시 속에 답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너무나 먼 이질적 생각들로 이 시를 혼돈케 할 테니까요. 아마 그것은 꿈을 가지라는 말이 아닐까요? 그럼 그대는 또 누구인가요? ‘그대역시 시 속에서 답을 찾는다면 바로 자기 자신아닐까요? 초월적인 어떤 존재이거나 어떤 선지자일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너무 모호케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은 곧 꿈을 꾸는 인간으로 이해됩니다. ‘꿈을 꾸는 인간은 새로운 삶의 가치를 만들고 해석해 나가는 인간이기도 합니다. 기존 질서에 안주하지 않고 기존 질서와 타협하지 않고 무한히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몸부림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꿈이 아닐까요?

 

새로운 아침, 창문에 친 발을 통해 여명의 아침을 맞습니다. 또 하루의 삶을 시작하는 시적 화자는 매일 자신의 삶을 새롭게 세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삶은 녹녹하지 않아 자신의 꿈과는 반대로 흘러가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래서 시적화자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보는 것이 아닐까요. 전자의 는 현재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이라며, 후자의 ()’는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참다운 자신의 이상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일치되지 못하는 이 간극, 이것은 영원한 인간 존재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거울 앞에서라는 말이야말로 이를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계는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거울에 비친 시계의 흐름은 정반대인 거지요. 자신의 꿈이 이 방향이었지만 매일의 삶은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기가 일쑤이지요. 그래서 시적 화자는 말합니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라고. 그럼 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인간 존재의 양상을 3가지로 설정하여 우리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첫째는 낙타의 단계입니다. 낙타는 끊임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 왜 가는지도 모르면서 사막을 걸어가는 인내와 당위의 삶의 사는 정신의 소유자입니다. 둘째는 사자의 단계입니다. 사자는 자신의 등에 지워진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자유를 향해 몸부림치는 자유정신의 추구자입니다. 셋째는 어린 아이와 같은 단계입니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며 그 순간에 몰입하여 무한한 반복을 통한 창조의 유희를 즐기는 자입니다. 이 어린아이들은 새로움을 향한 거룩한 긍정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며 현재를 즐기는 자유주의자입니다. 우리 인간은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다시 어린아이로 삶을 나아가야함에도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오히려 어린아이에서 사자로 그리고 낙타로 나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한 존재에 대한 인식을 지닌 시적화자에게는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이며 나는 내가 아닌것입니다. 여기서 은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자유와 창조와 몰입의 순진무구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시인은 ,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삶의 전부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있어서 그 은 신분증에 다 들어갈 수 없겠지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가 적힌 최소의 자기 이미지의 상징 속에는 그 거대한 긍정적 니힐리즘의 창조와 자유의 의지 추구가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다분히 철학적인 이 시는 쌓아도 무너지고/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시적화자는 파도가 밀려와 모래성을 무너뜨릴지언정 또 쌓는 어린아이처럼 그 꿈을 포기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거룩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을 견딘다는 건 힘이 드는 일이지만, 을 포기할 수 없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실존의 모습이 아닐까요?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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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開心子
    2019-04-08 삭제

    잘 감상하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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