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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19-07-23 오후 3: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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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 박상순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19-06-29 오전 9:22:34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박상순

 

 

그럼, 수요일에 오세요. 여기서 함께해요. 목요일부턴 안 와요. 올 수 없어요. 그러니까, 수요일에 나랑 해요. , 그러니까 수요일에 여기서……

 

무궁무진한 봄, 무궁무진한 밤, 무궁무진한 고양이, 무궁무진한 개구리, 무궁무진한 고양이들이 사뿐히 밟고 오는 무궁무진한 안개, 무궁무진한 설렘, 무궁무진한 개구리들이 몰고 오는 무궁무진한 울렁임, 무궁무진한 바닷가를 물들이는 무궁무진한 노을, 깊은 밤의 무궁무진한 여백, 무궁무진한 눈빛, 무궁무진한 내 가슴속의 달빛, 무궁무진한 당신의 파도, 무궁무진한 내 입술,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월요일 밤에,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다음 날, 화요일 저녁, 그의 멀쩡한 지붕이 무너지고, 그의 할머니가 쓰러지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땅속에서 벌떡 일어나시고, 아버지는 죽은 오징어가 되시고, 어머니는 갑자기 포도밭이 되시고, 그의 구두는 바윗돌로 변하고, 그의 발목이 부러지고, 그의 손목이 부러지고, 어깨가 무너지고, 갈비뼈가 무너지고, 심장이 멈추고, 목뼈가 부러졌다. 그녀의 무궁무진한 목소리를 가슴에 품고, 그는 죽고 말았다.

 

아니라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월요일의 그녀 또한 차라리 없었다고 써야 할까. 그 무궁무진한 절망, 그 무궁무진한 안개,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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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님, 오늘은 특별한 울림과 서사가 있는 시를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박상순 시인의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이라는 아주 독특한 발상과 반복을 통한 미묘한 욕망을 더듬어 갑니다.

 

1연에서의 시적화자인 는 사랑하는 이와 전화로 수요일 밤 여기서 섹스를 약속합니다. 2연에서는 그 약속을 통한 무궁무진한 상상들을 떠 올립니다. 봄날도 봄날의 밤도 밤을 거니는 고양이도 봄밤을 노래하는 개구리도 모두 무궁무진한 설렘 속에 존재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사랑하는 이와 하나 되는 꿈을 꾸는 순간의 상상은 다함이 없는 무궁무진의 세상이겠죠. 그래서 노을도 밤하늘의 달빛도 자신의 입술도 자신의 가슴도 무궁무진 속에 떨리고 설레겠지요. 모든 것은 환희에 차고 모든 것은 아름답게 비쳐집니다.

 

그런데 3연에 가면 시적 상황은 돌변합니다. 월요일에 약속을 하고 화요일 저녁-그를 만나기 하루 전날 저녁 세상은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난 걸까요. 그의 집은 무너지고 그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되살아나고,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포도밭이 되고 사랑하는 이의 구두는 더 이상 걷지 못하는 바윗돌이 되고 심장이 멈추고 목뼈가 부러져 그 역시 죽는 상황이 닥쳤습니다.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아무도 모르죠. 결혼 날짜를 받아놓고 돌연 교통사고로 이루지 못하는 슬픈 사랑의 비보를 접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듣습니다. 이 시의 주인공 역시 그와 유사합니다. 그래서 3연의 뒷부분에 가면 아니라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월요일의 그녀 또한 차라리 없었다고 써야 할까.’라고 독백하고 있음을 봅니다.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이 비극, 이 처참함 앞에 그녀의 무너짐은 또 무궁무진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시인은 그 무궁무진한 절망, 그 무궁무진한 안개,’의 늪을 지나 또 다시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이라는 말줄임표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는 얼핏 모순되는 것 같지만, 3연 중간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음 구절 즉 그녀의 무궁무진한 목소리를 가슴에 품고, 그는 죽고 말았다.’라는 구절로, 우리는 이 비극적 상황에서도 지극한 사랑의 진실함에 도달할 것 같습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 한 약속은 영원히 그녀에게 무궁무진하게 울림을 주고 떨림을 주고 포옹을 주는 것은 이 시가 가지는 묘한 역설적 진정성의 미학으로 다가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무궁무진한 사랑의 세레나데처럼 들립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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