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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19-09-14 오후 12:23:38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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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님, 이 한 편의 시를 읽으면 들뜬 세상의 부유물질들이 차분히 땅으로 내려앉는 기분이 듭니다. 고요하면서 애절하고 애절하면서 적막하고 적막하면서 아름다운 이미지가 아련히 펼쳐집니다. 어렵고 힘든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힘든 세월이 이렇듯 ‘눈꽃의 화음’에 귀를 기울이기는 쉽지 않겠지요.

 

막차를 기다리는 대합실, 힘든 하루의 일상에 지친 이들이 그믐처럼 졸고, 그 중 몇은 감기에 쿨럭 거리고, 청색의 손바닥으로 팔다만 사과를 만지작거리고, 모두 말없이 침묵하는 장면들 등은 이 시의 분위기를 어둡고 애잔하게 합니다. 한편 대합실 밖에 송이 눈이 내리고,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눈꽃의 화음과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 그리고 설원 등은 쓸쓸한 분위기 속에서도 따뜻함과 희망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쓸쓸함과 따뜻함, 물의 이미지와 불의 이미지, 떠남과 귀향, 자정 전과 자정 후의 시간 등 서로 상반된 이미지들이 충돌하지 않고 서로 상생하며 조화롭게 작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그 설원의 세계에 푹 젖어들게 합니다.

 

원시인님, 이 작품이 나온 지가 1981년이니 참 오래된 시입니다만 시대를 넘어 서민들의 애환과 슬픔을 서정적인 언어예술로 빚어낸 아름다운 작품임을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아름다운 시는 역시 시의 내용과 표현의 미묘한 어울림에 있음을 봅니다.

 

대외적으로 힘든 오늘의 삶들 앞에서 자정 넘어 설원의 세계를 꿈꾸며 조용히 응시하는 삶 또한 필요함을 느낍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사평역’을 이 한 편의 시로 새롭게 ‘사평역’이 생겼다 하니 이상은 현실을 창조해내는가 봅니다. 오늘 밤엔 ‘사평역’에 눈이 내리기를, 그리고 아픈 이웃들을 위해 ‘한 줌의 톱밥’을 던져주는 따뜻한 손들이 태어나기를 기원하면서 ‘사평역’을 향해 기차를 타 봅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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