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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위한 각서-세한도.44 / 강현국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19-11-23 오전 8:51:48





아들을 위한 각서 - 세한도.44

                                                                                                강현국

 

 

이따금 떨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이따금 우르르거리는 쥐떼들과 함께 200837일 모처 움막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허공과 공허는 다 같이 이름씨이다. 뼈다귀감자탕과 보쌈을 안주로 소주와 맥주를 밤늦도록 마셨다. 허공은 자연이고 공허는 인위이다. 소주와 맥주를 따로따로 마시다가 우리는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마셨다. 그대는 착해서 마시기 싫은 술을 내 식으로 벌컥벌컥 목마른 듯 마셔주었다. 잘 취해서 허공은 허공으로 발효하고 공허는 공허로 미끄러졌다. 허공과 공허는 비슷한 말이지만 섞이지 않는다. 허공하다는 말이 안 되고 공허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천정에서는 보이지 않는 쥐들이 우르르 우르르 소나기를 신고 뛰어다녔다. 공허가 한 짓이다. 허공을 떠다니는 남도의 꽃소식이 내 두개골을 열었나 보다. 새벽녘엔 쥐떼들이 아이젠을 신고 우르르 우르르륵 내 머리 속을 뛰어다녔다.

 

공허,

그것은 더렵혀진 허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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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님, 오늘은 강현국의 달은 새벽 두 시의 감나무를 데리고라는 시집에 나오는 시 한 편을 보고자 합니다. 이 시에는 공허허공이라는 아주 닮은 두 시어가 등장합니다. ‘공허허공은 기표 상 서로 매우 닮은 기호입니다. 음절이 서로 앞뒤로 바꿔 결합하여 그 기의까지 얼핏 서로 닮았지만 내적으로 그 기의는 상당히 다른 기호임을 시인은 말해줍니다.

 

이 시에서처럼 공허허공을 이렇게 명쾌하고 투명하게 바라본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허공과 공허는 다 같이 이름씨라고 하면서 허공은 자연이고 공허는 인위라고 말합니다. 허공은 인간의 감정과 감성의 세계를 벗어난 공간이요, 공허는 인간의 감정이 개입된 주관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공과 공허는 비슷한 말이지만 섞일 수 없는 즉, 본질이 다른 언어인 것입니다. ‘공허허공이라는 이 대척점에 놓여 있는 두 시어는 강현국의 시적 세계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함축적 시어입니다.

 

시적 주체는 모처 움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자신 안에 내재한 두 세계 사이의 갈등을 융화시키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고 공허를 달래고 싶어 하지만 허공은 허공인 채로 남을 뿐 자신의 내면은 더욱 공허할 뿐입니다. ‘새벽녘엔 쥐떼들이 아이젠을 신고 우르르 우르르륵 내 머리 속을 뛰어다녔다.’는 말은 공허의 세계 속에 있는 시적 주체의 욕망의 확인입니다. 여기서 쥐떼들은 다름 아닌 시적 주체의 무의식이기도 하죠. 닫힌 시적 주체의 무의식이 술로 풀어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술을 깨면서 새벽녘의 시적 주체는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무의식의 욕망들을 직시합니다. 더욱 괴로울 뿐이죠. 그리하여 그는 마지막 구절에 가서 공허, 그것은 더럽혀진 허공이리라.’라고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최소한 시적 주체가 공허의 집에서 벗어나 허공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를 아들을 위한 각서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더욱 확고한 지향점임을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 앞에서 하는 약속-각서는 지켜야할 마지막 보루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원시인님, 삶이란 주체가 어찌할 수 없는 길을 가기도 하는 길일 때도 있을 겁니다.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걸어야할 길일 때도 있겠지요. 공허의 세계에서 허공의 세계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소멸해가는 가을이 익어가는 가을이 되겠지요.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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