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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0-09-26 오전 8: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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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 박소란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19-12-07 오후 1:59:03





다음에

                                          박소란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 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함께 들어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 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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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님, 당신은 다음에와 연애해 본 경험이 있나요? 있죠. 시간이 나지 않을 때, 또는 그렇게 달갑지 않은 만남일 때,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마지막 헤어짐의 인사말 다음에 우리 한 잔 하죠그러나 그 다음은 영원히 오지 않을 시간이 될지도 모르죠.

 

박소란 시인은 우리의 일상 가운데 흔히 하는 이 인사말을 건져 올리고 있습니다. ‘다음이라는 말은 오지 않는 시간을 가리키면서 묘하게도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희망적인 의미의 말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이 시에서와 같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으로 이어지고 허공에 사라질 뿐인 말이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 다음에를 버릴 수 없습니다. 사연은 많으니까요. 다음에때문에 우리는 살아가고 살아내고 있기도 합니다.

 

많은 만남과 헤어짐 가운데 우리는 그래도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기약도 없는 말이지만 이 말을 버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겠지요. 지금 만날 수 없는 이여, 나는 슬퍼하지 않으리. 왜냐고요.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가기 때문이죠.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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