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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0-09-29 오후 5: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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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에서 / 민병도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0-06-20 오전 9:59:06






선운사에서

                               민병도

 

 

때늦은 꽃 맞이에 대웅전이 헛간이네

부처 보기 민망한 시자侍者마저 꽃구경 가고

절 마당 홀로 뒹구는 오금저린 풍경소리

 

무시로 생목 꺾어 투신하는 동백꽃 앞에

너도 나도 돌아앉아 왁자하던 말을 버리네

짓다 만 바람집 한 채 그마저도 버리네

 

비루한 과거 따윈 더 이상 묻지도 않네

저마다 집을 떠나 그리움에 닿을 동안

오던 길 돌려보내고 나도 잠시 헛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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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님, 선운사하면 동백꽃이 떠오릅니다. 법당 뒤 수백 년 된 동백나무는 스님이나 불자뿐 아니라 중생이나 가객, 이른 상춘객에게는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꽃 성지로 살아 있는 곳입니다.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고랑으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로 시작하는 선운사 동구, 김용택 시인의 여자에게 버림받고로 시작하는 선운사 동백꽃, 그리고 최영미 시인의 꽃이/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으로 시작하는 선운사에서는 누구나 선운사 동백꽃 앞에서는 시인으로 잠시 머물게 합니다.

 

여기 민병도 시인의 시조 선운사에서도 우리를 시의 세계로 잠잠히 이끌어 줍니다. 시인은 아마 뭇 꽃이 만개한 3,4월쯤 선운사에 들린 모양입니다. 동백꽃 구경은 그야말로 때늦은 꽃 맞이인 셈인데 절에 들리니 모두 꽃구경을 가고 오직 절간에 남은 것은 부처와 풍경만이 남았습니다. 심지어 시자侍者까지 꽃구경 가고 없으니, 텅텅 빈 도량을 둘러보며 시의 화자는 부처 보기 민망했다고 표현하고 있겠지요. 오직 도량을 깨우는 것은 풍경소리밖에 없는데 그것도 오금저린 풍경소리라 했으니, 시적 화자의 심리적 소리로 독자들에게 전해옵니다. 크게 떨렁 떨렁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고요하게 이따금 조용조용 딸랑 딸랑거리는 청각에 의한 심미적 체험을 느끼게 합니다. 그만큼 절간은 고요하고 텅 빈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동백꽃은 통꽃으로 집니다.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벚꽃 같은 것은 화사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지만, 통째로 툭 툭 떨어지는 동백꽃은 아름다움보다 처연한 느낌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래서 꽃구경하는 이들 모두 말을 버리고 다만 바라보기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사를 살면서 왁자하게 지껄이던 모든 말들을 내려놓고 고요히 침잠한 채 떨어지는 꽃을 맞이하게 됩니다. 더욱이 생목 꺾어 투신하는 동백꽃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은 절간 안에서나 절간 뒤 꽃 앞에서나 같습니다. 더 나아가 짓다 만 바람집 한 채 그마저도 버려야 하는 절정의 순간에 다다르게 됩니다. 삶은 어쩌면 바람希望의 연속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극한 상황 앞에 다다르면 모든 바람들은 다 내려놓고 오직 존재 그 자체만으로 만족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지요. 바람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욕심에서 빚어지는 것이지만, 만법이 무상한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깨달음 앞에서는 한낮 그것도 내려놓을 아집我執의 세계임을 인식하게 합니다. 찬란히 피어올랐다가, 그 붉은 꽃송이를 통째로 뚝 뚝 떨어뜨려 자신을 버리는 동백꽃을 보고 무슨 속세의 모든 원들을 갈망하겠습니까? 바람은 바람처럼 또 흔적 없이 왔다가는 것. 시인은 그 동백꽃 앞에서 숙연히 고개를 숙이고 속세의 말言語도 속세의 바람들도 모두 잠재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비록 동백꽃은 다름 아닌 두고 온 부처의 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부처는 불상 속에만 있지 않고 도량 속에만 있지 않으며, 삼라만상 모든 곳에 있음을 역설적으로 은은히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핵심적인 것은 시어 헛간에 있습니다. 첫수에서 대웅전이 헛간이네라고 한 적이 있음을 우리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웅전이 헛간이라니? 우리는 잠시 어리둥절할 수 있지만 이야말로 낯설게하기의 시적 기법을 사용한 역설적 미학을 담은 표현입니다.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는 대웅전을 시골의 헛간에 비유한 것은 헛간의 고요함과 텅 빔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입니다. 헛간의 이미지 중 허름함과 잡다한 물건을 넣어두는, 그렇게 소중한 것 같지 않은 이미지가 있어 자칫 독자들은 놀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성한 신(부처)이 거처하는 대웅전을 한낱 시골의 헛간에 비유했으니.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 보면 , 대웅전이야말로 헛간의 이미지와 통할 때 가장 그곳이 대웅전의 참모습과 어울릴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을 또 하게 합니다. 이는 마치 예수의 탄생을 마굿간에서 출발한 것과 유사한 상상을 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춘수 시인이 그의 시 나의 하나님에서 사랑하는 하나님, 당신은/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라고 한 낯설게하기의 기법과 유사합니다. 김춘수 시인은 하나님을 푸줏간에 걸린 살점에 비유하여 많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나, 그 깊은 신의 내밀한 강생은 더욱 깊은 의미를 던집니다. 가장 신성하고 거룩함, 즉 신의 본질은 오히려 낮고 하잘것없는 곳에서 발견됨을 우리는 익히 알기 때문입니다.

 

헛간의 이러한 고요함과 텅 빔의 이미지는 비움의 미학이 더욱 역설적으로 다가오게 합니다. 본질상 부처는 채움의 미학이 아니라 비움의 미학이기 때문이겠지요. 자신을 내려놓고,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 꼭 필요한 삶의 진리를 우리는 부처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헛간의 용도 역시 있는 듯 없는 듯 있으면서 정말 중요하고 요긴한 것이지요. 이같이 나도 잠시 헛간이네라는 구절은 더욱 깊은 의미를 넌지시 던져 주고 있습니다. 비록 잠시지만 뚝 뚝 자신을 비우는 동백꽃 앞에서 시인 자신도 헛간이 되어 보는 것이죠. 대웅전 안에서 부처를 만난 것이 아니라, 동백꽃 앞에서 부처를 만난 느낌을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의 화자 역시 자신의 에고ego에 의해 살아왔던 욕심의 삶에서 벗어나 텅 빈 참나의 삶으로 돌아가고픈 역설의 시로 읽혀집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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