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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 기형도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0-09-26 오전 8:39:36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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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님, 이보다 더 절절한 작별이 있을까요? 기껏해야 아홉 줄밖에 되지 않은 아주 짧은 시인데, 읽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 옵니다.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것 때문에 그럴까요? 그것도 있겠지만 그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독자들도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이 시가 가지는 슬픔과 비장미에 젖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 시가 가지는 미학성 때문일 것입니다.

 

첫 연에서 시의 화자는 사랑을 잃었다고 담담히 고백합니다. 그런데 둘째 연에 가면 단순한 사랑의 이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과의 이별이 아니라 자신과의 이별임을 우리는 눈치 챕니다. ‘짧았던 밤들’,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과의 이별은 곧 자신의 인생과의 이별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삶을 둘러싸고 있던 사물들과의 이별은 그 어떤 것보다 마지막이라는 절정의 비장감을 자아냅니다. 하얀 종이 위에 써 내려가는 유언 같은 시들 앞에 당면한 흰 종이는 공포 그 자체일 것입니다. ‘흰 종이들이나 이어 나오는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은 바로 자신의 객관적 상관물로서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세상과의 이별 앞에서 그는 절절하게 토로합니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이라고. 열망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삶의 종착역을 알리는 것이며, 그 동안 삶의 힘듦과 고통이 덕지덕지 붙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고 끝맺음으로서 아련한 여운을 남깁니다. 한 생을 힘껏 살았지만 장님처럼 세상은 보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문을 잠가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은 결국 빈집에 갇혔으니 자신이 열지 않는 이상 그 사랑은 끝임을 의미하겠지요. 자신의 운명을 예언이라도 하듯 이 시가 시인의 마지막 시가 되었으니 더욱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합니다.

 

원시인님, 이런 슬프고도 애잔한 시를 들먹거리는 것은 인간 존재 자체가 비극적이고 고독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이 짧은 시 속에 시인의 치열한 삶의 흔적들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길고 짧음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치열하게 열정을 다해 세상을 사랑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련히 어두워가는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저녁입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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