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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1-09-20 오후 1: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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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 박남수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1-01-16 오전 9:34:58






                                 박남수

 

 

하늘에 깔아 논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고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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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사물에 목적을 부여하는 존재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세상은 무목적적인지 모릅니다. 들판에 핀 한 송이 꽃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이웃한 꽃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존재 그 자체로 충만하여 꽃을 피우고 새가 울고 하늘은 푸르게 빛날 것입니다.

 

박남수 시인의 는 바로 이점에 착안하여 쓴 시로 읽힙니다. ‘논 여울터나 나무 그늘에서 지저귀는 새는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노래하고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지요. 또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사랑하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이 또한 박남수 시인의 안경을 통한 세상 읽기이지만 전자에서 본 세상 읽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발견합니다. 전자 즉 사물에 의미 부여는 오직 인간의 기준으로 세상을 읽는 방식이고, 후자 즉 무의미의 존재 발견은 모든 존재의 근원적 세상 읽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존재에 의미를 부여할 때 그 존재의 존재 값이 매겨져 허전함을 메워나갑니다. 그러나 실상 모든 존재의 존재 값은 인간이 메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조물주가 메겨 둔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의 눈으로 다시 메긴다는 것은 존재의 본래적 순수의미를 왜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을 이야기하고 순수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 역시 인간 존재에 대한 순수의식 없이 목적적으로 대하는 순간 인간이 세상에 값어치를 발휘하는 삶의 역동적 가치를 부여할지 모르겠으나, 자칫 그 목적이 사라지면 허무와 무상의 가치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들판을 날아다니는 한 마리 새의 지저귐은 인간의 이러한 목적적 삶의 의미 부여를 넘어선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이 한 마리 새의 사랑 같지 않고, 그것에 의미를 만들거나 사랑을 가식하고 있음을 시인은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순수를 겨냥하지만/매양 쏘는 것은/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순수존재 그 자체의 값일 것이고 한 마리 상한 새인간의 눈으로 그 존재에게 값을 부여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모든 존재는 그 순수 자체로 삶을 살 때 충만한 삶의 노래를 부르며 기쁨에 가득 찬 생활을 영위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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