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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1-09-20 오후 1: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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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집 / 유수진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1-02-27 오전 8:06:00






저녁의 집

                                      유수진

 

 

아침이라면 모를까

저녁들에겐 다 집이 있다

주황빛 어둠이 모여드는 창문들

수줍음이 많거나 아직 야생인 어둠들은

별이나 달에게로 간다

 

불빛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건

다 저녁의 집들이다

 

한 켤레의 염치가 짝짝이로 돌아왔다

수저 소리도 변기 물 내리는 소리도 돌아왔다

국철이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설거지를 끝낸 손가락들이

소파 한 끝에 앉아

어린 송아지의 배꼽, 그 언저리를 생각한다

 

먼지처럼 버석거리는 빛의 내부

어둠과 빛이 한 켤레로 분주하다

저녁의 집에는 온갖 귀가들이 있고

그 끝을 잡고 다시 풀어내는 신발들이 있다

 

적어도 창문은 하루에 두 번 깜박이니까 예비별의 자격이 있다

 

깜박이는 것들에겐 누군가 켜고 끄는 스위치가 있다

매번 돌아오는 관계가 실행하는 수상한 반경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있고

스위치를 딸깍, 올리면 집이 된다

 

 

별은 광년을 달리고 매일 셀 수 없는 점멸을 반복한다

그러고 나서도

어수룩한 빛들은

얕은 수면 위로 귀가한다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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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님, 여행을 하다 어느 날 저물 때 멀리 어둠이 내리고 산자락 아래 가로등이 켜지고, 이어 하나 둘씩 창문에 불이 들어오는 마을을 지나면 참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아 이것이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풍경이구나, 저 저무는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있어 이 세상이 그렇게 외롭지 않구나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집에 불이 켜진다는 것은 사람이 산다는 말이고, 낮에 나갔던 발걸음들이 돌아왔다는 의미입니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나갔던 사람들이 저녁에 돌아와 불을 밝히면 고단한 하루의 불빛들이 웅성거립니다. ‘수저 소리, 변기 물 내리는 소리, 설거지 소리들로 붐빕니다. 모두 한 집에 사는 식구들이겠지요. 제 각각 하루를 돌아다니다 모두 따뜻이 모여드는 일상의 생활이 이렇게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코로나19바이러스 시대이기에 더욱 그러할 겁니다.

 

모든 존재는 나름대로 귀소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어 같은 물고기들은 모천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오고,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살던 굴을 향해 머리를 둔다고 하지요. 한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나무도 하늘로 걸었던 결실을 자기가 태어난 땅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생명을 지닌 자들의 귀향본능에서 비롯된 것들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집은 어쩌면 존재의 영원한 고향입니다. 그곳이 먼지처럼 버석거리는 빛의 내부일지라도 어린 송아지의 배꼽, 그 언저리를 생각하는 식구들이 있기에 얼마나 따스한 세상입니까. 비록 수줍음이 많거나 아직 야생인 어둠들은/별이나 달에게로 가지만 별은 광년을 달리고 매일 셀 수 없는 점멸을 반복하어수룩한 빛들은/얕은 수면 위로 귀가하는 집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요?

 

이 시의 매력은 이러한 일상의 행복을 잔잔히 노래한 점도 있지만 이것을 매우 낯설게 표현함으로써 의미의 깊이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수줍음이 많거나 아직 야생인 어둠들에서는 어둠들이 수줍다는 것에서는 의인화를, 어둠들이 식구들을 가리킬 때는 은유화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 재밌습니다. 또한 한 켤레의 염치가 짝짝이로 돌아왔다애서 염치 역시 가족을 대신해주고 있으며, 그 가족들은 또 소파 한 끝에 앉아/어린 송아지의 배꼽,/그 언저리를 생각한다를 통해 가족의 공동 관심사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가슴이 따뜻한 한 편의 아름다운 시입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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