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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용악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2-03-19 오전 9:08:16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용악
우리 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 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停止)를 가르쳤다.
때늦은 의원(醫員)이 아모 말 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시집 『분수령』(1937) 수록
(*자래운: 자라게 한, 키운 *아무을 만 : 아무르 만 *설룽한: 춥고 차가운 *가르쳤다: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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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참 오래된 시 한 편을 읽어봅니다.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라는 시는 이용악 시인이 1930년대에 쓴 시입니다. 시를 읽고 있으면 시적 상황이 눈에 훤히 그려집니다. 옛날부터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 했는데 이를 두고 말함 같습니다.
화자의 아버지가 고향도 아닌 타향에서 마지막 임종을 맞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식에게 한 마디 유언도 없이, 삶을 위해 만주벌판을 떠돌다 어느 객지에서 쓸쓸히 맞는 최후의 밤, 침상도 없이 차가운 방에서 목침을 벤 채 이 세상을 하직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민족의 황량한 벌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의원이 다녀가고 하얀 무명천이 낯을 덮으면 그것으로 이 세상과의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죽음 앞에서 홀로 오직 홀로 자신에게 주어진 고독을 끌어안고 영원한 침묵에 듭니다. 남겨진 이는 울음을 다 울면서 보내지만 정작 그는 눈물 한 방울도 보일 수 없는 것이 삶인가 봅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들의 삶을 더욱 애잔하게 이끕니다.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 우리는 슬퍼해야 하고 또 침묵해야 합니다. 그 모든 순간, 밤을 지새우는 풀벌레 소리는 적막한 비장미를 더욱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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