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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도(烏瞰圖)-제1호 / 이상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2-04-03 오전 9:38:03

오감도(烏瞰圖)-제1호
이상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러케뿐이모혓소.(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뚤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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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님, 한국 현대시사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심한 충격을 가져다 준 작품이 아마 이 이상의 「오감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시 소설가 이태준의 소개로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실렸는데 독자들의 비난이 심해 30회 연작으로 발표하고자 했는데 15편으로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독자들이 이것도 시이냐고 항의가 빗발쳤고 신문이 폐간될 위기까지 갔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정서로는 이러한 난해시가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반가운 것은 그 당시 독자들이 시에 이렇게 관심이 많았던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여 반갑기도 한 측면이 있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지금도 갈리고 그 해석이 분분하여 우리나라 난해시의 출발이자 정점에 있습니다. 최근 많은 학자들의 해석으로 조금씩 이해되고 있으나 그 중 권영민 교수의 해석에 매우 공감이 갑니다.
시 <오감도>는 당시 정서와 시적 기법으로는 분명 난해시이긴 하나 그렇다고 말도 안 되는 말의 지껄임은 분명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고 그것을 응축하여 표현한 거시적인 시대정신의 위대한 소산물입니다. 1930년대에는 세계사적 흐름으로 서구 자본주의가 싹터 발돋움하는 때이고 또한 그 영향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생산과 소비가 늘어나고 도시화·상업화·물신화의 풍조가 일어나던 때입니다. 그 전까지는 인본주의 정신의 바탕에서 인간의 삶이 유지되었다면 자본주의는 인간보다 자본 즉 돈이 그 주인 자리에 올라선 것을 이상은 본 것입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13인의 아해’는 어느 특정한 아이들이 아닙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도, ‘우리나라 13도’ 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현대를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 길들여가는 익명의 우리 민중이고 서민이 아닐까요. 자본의 발전으로 삶이 윤택해지는 것은 분명 맞기는 하나 시인 이상은 그 점보다는 그로 인해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이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가 지은 많은 소설 작품에서도 돈의 문제가 깔려 있으며 그 돈(물질)이 인간의 주인이 되고 그로 인해 예속되어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상의 <날개>에서 현대문명의 정점이었던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에서 주인공이 외친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라는 절규는 당시 물질문명의 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인간회복의 외침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의외로 아주 단순합니다. ‘도로로 질주하는 13인의 아해’, ‘ 그 아해들은 모두 무서워하고 있음’, ‘무서움의 대상은 바로 그 아이들이라는 사실’, ‘질주하는 아이들이 막다른 골목이든 아니든 질주하든 안 하든 상관없는 상황’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13인의 아해는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군상입니다. 그들은 자본을 위해 경쟁하고 투쟁하는 인간들이지요. 그래서 자본을 위해 질주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가운데 온갖 비정한 일등이 일어나겠지요. 전통적인 인간의 본성은 간데없고 오직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위해 달리는(질주하는) 본능적인 짐승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서 달리는 사람(아해)들입니다. 무서움의 존재도 아해고 무서움의 대상도 아해들이지요. 그리고 그 길은 어쩌면 막다른 골목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트리나 폴러스의 동화를 떠올리게 하는 세계의 아귀다툼만 일어날 뿐이지요.
아무리 몸부림쳐도 현대의 이 물질문명의 자본주의의 그림자 속에서 헤어날 수 없는 시대를 간파한 직관의 시가 바로 이 「오감도 제1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 하늘 위를 나는 까마귀의 눈으로 이 세계를 바라본 「오감도 제1호」, 횡설수설한 말장난도 아니며 의미의 일관성이 없는 정신착란의 시는 더욱 아닙니다. 현대 물질문명 속에서 우리는 다 같이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물질이 가져다주는 행복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불안과 공포를.... 그래도 우리는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트랙 위를 몸부림치며 질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인 이상은 이러한 물질세계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휴머니즘의 세계를 추구한 시인으로 읽혀집니다. 그의 천재성으로 기법이 너무나 독특하여 당시 독자들이나 현대의 독자들이 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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