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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그 뻔한 것에 대해 / 차주일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2-07-02 오전 7:40:41

그리움, 그 뻔한 것에 대해
차주일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서면
뒤돌아보는 시야만큼 공간이 생겨난다.
부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만큼 팽창하는 영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유배지.
외곽을 허물어놓고도 자신만 탈출하지 못하는
누구도 입장할 수 없는 성역聖域에
과거로 얼굴을 펼치고
미래로 표정을 그리는 사람은 쉬이 눈에 띄었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내 마지막 표정이 생각나지 않아
내 얼굴에 무표정이 머문다.
무표정이 진심이라는 풍문이 떠돈다.
-시집 《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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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님, ‘그리움’이라는 주제는 시인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다루고 보듬고 애무한 시어일 것입니다. 그런데 차주일 시인은 이 ‘그리움’이라는 보편적 시어를 다루면서 ‘그리움’ 자체에 무게를 두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움에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향한 마음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정작 대상과는 여전히 거리를 두기 때문에 그리움이겠지요. 그것을 시인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서면/뒤돌아보는 시야만큼 공간이 생겨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선하고 새롭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움은 절절한 만큼 그리움의 공간은 넓게 펼쳐지지요. 그 영토는 넓지만 마치 유배지처럼 온전히 자신을 만나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유배지는 울타리가 있는 외형적 유배지가 아니라 스스로 만든 감옥과 같습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자신만의 유배지이지요. 그래서 ‘외곽을 허물어놓고도 자신만 탈출하지 못하는’이라는 구절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리움은 ‘과거로 향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또 한편 미래를 그리고 담고 있는 야누스의 얼굴이기도 합니다. 그리움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깊이 천착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 인간 존재 깊숙이 천착하고 있는 ‘그리움’이라는 존재를 이렇듯 명징하게 시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모습을 비춰 볼 때입니다. 남들은 다 볼 수 있는 나의 얼굴을 정작 자기 자신은 볼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질적 속성 아닐까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내 마지막 표정이 생각나지 않아
내 얼굴에 무표정이 머문다.
그리고는 슬쩍 건드려 놓습니다. ‘무표정이 진심이라는 풍문이 떠돈다.’라고. 어쩌면 시인은 이 말을 하고 싶어 이 시를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짓는 많은 표정들 어쩌면 그 표정들은 다 시간이 흐르면 무표정의 표정들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무표정이야말로 가장 진심이고 진실한 모습이라는 의미로 아련히 다가옵니다. 그리움의 감정이 깊고 넓을수록 그 극점에 가면 무표정의 그리움으로 읽혀질까요? 불교의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의 그림자도 얼핏 비치는 무상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는 듯도 합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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