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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2-10-11 오전 8:33:09






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일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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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님, 가을만 되면 그 옛날 읽었던 릴케의 이 가을날이라는 시가 떠오르는군요. 짧은 시이지만 이처럼 오래도록 나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은 이 시 속에 잠든 영혼의 울림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시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전반부(1,2)는 가을을 통해 계절의 변화와 그 계절의 충만함을 통해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는 신에의 경건함과 겸손함이 드러납니다. 1연에서 우리는 신의 존재와 우주적 존재 속에 있는 모든 존재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 합니다. 참으로 무더웠던 지난여름과 그리고 이제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결실의 계절을 떠올립니다. 2연에 가면 아직 덜 익은 과일들을 위해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달라는 인간의 소박한 겸손과 우주적 경이를 담담히 풀어놓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과일들이 단맛이 들기 위해서는 따뜻한 햇볕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모든 곡식과 과일들은 무르익고 제 맛을 내기 시작하지요.

 

후반부(3,4)에 가면 갑자기 선회하여 인간 존재의 고독한 삶을 노래합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다름 아닌 시인 릴케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친교가 있는 사람들에게 한평생 편지를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도 좋아했던 루 살로메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해 더욱 그의 삶이 고독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릴케뿐만 아니라 모든 실존적 인간이 지니는 모습이 아닐까요.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가 바로 인간인 것이지요. 자연의 변화로 가을은 저렇듯 풍요롭지만 낙엽이 바람에 떨어져 날릴 때, 그 어느 누구도 존재의 본모습에 눈과 귀를 기울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인간 존재는 본디 고독한 존재로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고독할 때 거룩한 신의 옷자락을 만질 수 있나 봅니다. 그것이 인간 존재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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