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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야(雪夜) / 박용래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3-01-14 오전 10:48:15

설야(雪夜)
박용래
눈보라가 휘돌아간 밤
얼룩진 벽에
한참이나
맷돌 가는 소리
고산 식물처럼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시던
오리오리
맷돌 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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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님, 오늘은 1950~1960년대 주로 활동했던 박용래 시인의 설야(雪夜)라는 시를 살펴볼까합니다. 이제 며칠 있지 않으면 설날이 다가옵니다. 우리의 고유한 명절 설날은 새해맞이의 기쁨과 가족 간의 두터운 정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네 시골 어머니들은 이 추운 겨울에도 밤이 되면 멀리 있다 돌아올 가족을 위해 맷돌을 돌려 두부를 만드시곤 했습니다.
이 시에는 잊을 수 없는 우리의 고향과 눈 내리는 겨울밤의 서정과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이 잘 녹아 있습니다. 이 시의 시적 배경은 아주 간단합니다. 지금 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방안엔 희미한 등잔불 아래 맷돌을 돌리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시인은 어렸을 때 그 맷돌 돌리시는 어머니의 영상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나 봅니다. 이 간단한 시적 배경이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된 것은 ‘얼룩진 벽’이나 ‘고산 식물처럼 늙으신 어머니’나 ‘오리오리’라는 시구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냥 늙으신 어머니가 아니라 ‘고산 식물처럼’이라는 시어를 씀으로써 고단함과 외로움을 느끼게 하고, ‘얼룩진 벽’을 통해 그 맷돌 돌리시는 어머니의 얼룩얼룩한 모습이 나타났다 사리지기도 합니다. 특히 마지막 3행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시던/오리오리/맷돌 가는 소리’에서 ‘오리오리’라는 시어는 매우 함축적인 의미잉여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맷돌 돌아가는 소리의 청각적 울림에서 그치지 않고, 그 맷돌 소리가 오리(五里)까지도 이어져 가는 공간성을 확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오리오리’는 이러한 의미 함축보다 ‘오리, 오리’ 즉 ‘올 것이리, 올 것이리’라는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믿음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비록 8행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이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과 기다림 그리고 어머니의 적막하고 외로운 삶이 떠오릅니다. 읽고 있으면 아득하고 눈물겹습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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