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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3-02-11 오전 9:03:10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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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4·19세대를 겪고 난 뒤 어느 소시민의 눈으로 바라본 좌절과 절망의 노래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진술하기 때문에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쉽게 이해되는 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에서 꼭 짚고 넘어갈 하나의 삶의 철학이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정한 세상과 타협하여 변해버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4.19의거에 참여하여 정의가 바로선 세상을 외치던 이들이, 어느덧 18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모습은 불의와 알게 모르게 타협한 굴종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를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라는 구절에 이르면 시적 화자는 스스로 돌아보고 비참함에 대한 자의식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인간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낙타의 삶이며, 두 번째가 사자의 삶이며, 세 번째가 어린아이의 삶입니다. 여기서 ‘낙타의 삶’은 사회 규율이나 도덕적 명령에 순종하며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짐을 지고도 견디어 내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자의 삶’은 기존의 관습과 규범을 타파하려는 저항 정신을 보이는 자기 의지의 삶이며, ‘어린아이의 삶’은 순종과 명령에 대한 저항의 삶의 단계를 넘어 삶 자체를 즐기고 유희하는 존재 그 자체의 자연스런 삶을 말합니다.
위의 시는 이 세 단계의 삶에 견주어 본다면 첫 번째 ‘낙타의 삶’에 대한 반성의 나직한 목소리의 시입니다.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부끄럽지 않은가/부끄럽지 않은가/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혈기 왕성한 젊은 청춘의 삶에는 피 끓는 정의와 자유가 살아 움직이지만, 어느덧 가정을 꾸리고 삶에 찌들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부정부패의 사회와 타협하고 자신도 모르게 그 사회에 젖어 사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 삶의 군상입니다. 특히 마지막 줄친 구절은 이를 미학적으로 형상화하여 독자들에게 당신들은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물어오는 듯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인간들을 니체는 마지막 인간(최후의 인간)으로 세속적이며 물질 풍요만을 추구하는 인간형으로 그가 추구했던 위버멘쉬(초인)와는 상반되는 인간형입니다. 삶의 춤을 출 수 있는 어린아이의 삶 그것이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이며 진정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초인인 것입니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 아닌, 자신의 의지에 의해 주체적으로 사는 인간이기를 다시 묻고 있습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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