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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나리 / 전명숙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3-05-27 오전 8:48:48

희나리
전명숙
밤하늘이 어릴 적 사랑방 아궁이 같아요 사윈 화톳불이 깜빡이며 꺼질 듯이 푸석거려요 매캐한 연기가 찌지직거리며 달빛을 가둘 때 맘속 비밀들은 구름 사이로 숨겨놓아요 달력처럼 한 장씩 저민 솔잎에서 우러난 차향이 코끝을 자극하며 번져요 처음 우리 만났던 날은 초승달이 내려앉은 밤이었지요 보름날엔 또 어떠했고요 서로에 대한 궁금함으로 활활 타올랐지요 별들이 낮에는 그리움을 꾹꾹 눌러 발효시키다가 밤이 되면 불씨들이 기지개키며 하나 둘 불을 지펴요 솔바람에 타닥타닥 반달이 화하게 번져 구들장이 솔향기로 화끈거리다 말라 갔지요 에필로그처럼 나이의 그믐이 짙어가고 주름진 손등처럼 눈에 비치는 별들도 침침해져요 이상해요 깡그리 말라버린 몸에서 슬픔이 아름답게 번져요 한장 한장 넘긴 달력 사이로 눈물을 쟁여 넣었는지 뒤척거리는 별빛만 보아도 울컥울컥 하다가 그 눈물을 짜내면 오히려 흐린 눈이 후련해져요 알고 보니 기쁨과 슬픔의 재료는 눈물이네요 그믐달이 보여요 달력 한 장을 또 넘길 때가 됐네요 묵혀둔 그리움이 어디쯤인가 하늘의 구석진 자리에서 투명하게 깜박이면 좋겠어요 내 안에 지펴 논 사그라지지 않는 불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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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나리」는 전명숙(향일화) 시인의 대화체 형식의 산문시입니다. 그러나 대화를 하는 건 아니고 일방적인 고백체의 서정시입니다. 시적 화자는 지금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믐달이 흐릿하게 뜬 밤하늘을 쳐다보며 자신의 나이 들어감과 자신의 과거와 슬픔을 반추하고 있습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물기가 점점 말라간다는 의미이고 이를 시인은 ‘희나리’라는 나무에 견주어 노래하고 있습니다. 희나리는 채 마르지 않는 장작을 말합니다. 장작이 잘 타려면 물기가 완전히 말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시적 화자의 존재를 ‘희나리’에 견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무엇보다 함축적인 표현들이 많아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또 매우 서정적입니다. 그믐달이 뜬 흐릿한 밤하늘을 시인은 ‘사랑방 아궁이’ 같다고 합니다. ‘사윈 화톳불이 깜빡이며 꺼질 듯이 푸석거려’라든지, ‘매캐한 연기가 찌지직거리며 달빛을 가둘 때’라든지, ‘묵혀둔 그리움이 어디쯤인가 하늘의 구석진 자리에서 투명하게 깜박이면 좋겠어요’ 등 많은 구절에서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서정적인 아름다움은 지난 젊은 날의 초승달 같은 신선함과 보름달 같은 성숙의 경지도 지나고, 이제 나이 들어 그믐달과 연계되면서 쓸쓸함과 슬픔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흐릿한 달빛’, ‘침침한 별’, ‘뒤척거리는 별빛’ 등 많은 구절들이 삶의 구석진 자리를 지칭합니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그 슬픔에서 달아나거나 멀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관조합니다. 오히려 그 애잔함에서 ‘흐린 눈이 후련해진’다고 노래하여, ‘기쁨과 슬픔의 재료는 눈물’이라는 깨달음을 얻기까지 합니다. 더 나아가 슬픔을 발효시켜 기쁨의 원천이 되기를 소망하기도 합니다.
별들이 낮에는 그리움을 꾹꾹 눌러 발효시키다가
밤이 되면 불씨들이 기지개키며 하나 둘 불을 지펴요
전명숙 시인의 「희나리」는 인간의 삶과 사랑의 이야기를 불타는 아궁이와 희나리와 밤하늘을 배경으로 펼친, 삶에 대한 잔잔한 성찰과 치유의 시간을 펼쳐 보여주는 아름다운 한편의 서정시입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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