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전시관
- 글
무제(無題)1 / 이영도
[원시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사입력 2023-06-24 오전 9:19:44

무제(無題)1
이영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래도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
이영도 시조 시인의 「무제1」을 대하고 있으면 무채색의 아련한 그리움을 느낍니다. 선명한 무지갯빛 그리움이 아니라, 색깔이 있는 듯 없는 듯 무채색의 깊은 수묵화의 그리움이 배어 있습니다. 그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드러내놓고 사랑할 수도 사랑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시인의 숨은 사랑의 그림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청마 유치환 선생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여인 이영도. 그녀는 청도 출신으로 시조 시인 이호우의 여동생으로 17세에 결혼하여 사별하고 혼자되었을 때 청마 유치환을 만나게 됩니다. 유치환 선생은 기혼한 상태였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20여 년 동안 수 천 통의 사랑의 연서를 보냈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플라토닉 러브의 사연이 이 시 속에 은은히 잠재되어 있습니다. 1967년 불의의 사고로 청마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그의 수 천 통의 편지 중 200여 통의 편지를 골라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청마 유치환의 서간집을 발간하였습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날 어쩌란 말이냐(유치환 ‘그리움’)라고 절절한 사랑의 고백 앞에서 그녀의 마음 또한 얼마나 흔들렸을까요? 청마의 끝없는 시와 사랑의 연서에 그녀가 답한 것은 「무제無題」였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의 돌다리 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설렘과 갈등을 시인은 시에서처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그러다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그래도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러한 애절한 사랑 위에 제목 또한 어떻게 당당히 붙일 수 있었으랴. 사랑하는 이이지만 이름도 내어놓고 호명할 수 없는, 안으로 그 사랑을 삼켜야 하는, 그 아련한 안개 같은 사랑의 마음을 ‘무제’라고 표현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마음의 현(鉉)을 퉁겨줍니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 ‘행복’ 중)
사람은 가고 사랑도 가고 그 사랑의 흔적만이 남았습니다. 그 사랑의 흔적만이 침묵으로 다시 살아나는 초 여름밤입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jpg)
.pn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