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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은 나의 삶이다!
80 평생 고향 지키는 소나무, 하양읍 한사리 최재림 선생

기사입력 2017-10-11 오후 5:20:36

      ▲ 하양읍 한사리 최재림 선생.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고 있다. 80 평생, 고향을 지키며 우직한 선비의 모습으로 사는 선생의 삶에서 고향은 어떤 의미일까? 그렇게 살아온 소회는 어떨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마을 반장으로 동네청소에 앞장선다. 십리 길은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지역의 대소사는 부지런히 참여한다. 겉으로 보이는 선생의 모습이다.

 

“1965년도에 내 월급이 4천원이었는데 3천원주고 중고자전거를 한 대 샀어. 출퇴근용으로 쓰려고 대구 내당동까지 가서 사가지고 한나절이 넘도록 페달을 밟아 하양까지 가져왔지만 막상 출퇴근용으로 타고 다니지는 못했네. 왜냐하면 같은 마을에 사는 형님이 자전거가 없었어. 형님이 걸어 다니는데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는 없었네. 형님께 드렸어. 3년이 지나서 형님이 내게 자전거를 한 대 사주셨어.

 

그 후로도 농사짓는 형님보다는 월급 타는 내가 살림살이 장만이 수월했지만 큰집(형님네)에서 TV를 사야 나도 샀지 좋은 걸 내 먼저 한 적은 없었다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선생의 삶의 한 단면이다.

 

연봉이 5만원인 마을 반장을 6년째 맡고 있다. 여든이 넘었지만 동네청소를 앞장서고 큰집 청소도 직접하며 홀로된 형수와 큰집을 보살핀다.

 

나아가 문중, 향교, 육영재, 청년회, 체육회, 육성회, 노인회, 번영회, 위원회 등에서 총무, 전교, 훈장, 회장, 고문, 위원장 등 많은 직책을 맡아왔다.

 

선생이 맡은 일은 대체로 남들이 잘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들이다. 그러니까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남들이 알아주는 일도 아니다.

 

선생은 하양초등학교를 일등으로 졸업(당시 일등 졸업생에게 군수상을 주었는데 선생이 군수상을 받음)하고 대구사범병설중학교와 대구상고를 졸업했다. 당시로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볼 수 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은 못했지만 충분히 부귀공명을 쫓는 길을 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고향에서 고향을 지키고 가꾸는 우직한 삶을 살고 있다.

 

추석명절을 맞아 선생을 찾아뵙고 고향을 지키는 소나무 같은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먼저 최근 마무리 작업 중인 하양읍지 편찬 경위와 그 의미를 물었다.

 

“1933년에 화성지(花城誌)가 출간된 이후 80년이 넘게 지역사회의 역사가 편찬되지 않았다. 과거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미래로 나아갈 디딤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읍지편찬은 전통문화와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나간다는 의미를 가진다.

 

1996년에 한문으로 된 화성지 국역작업에도 참여했다. 화성지는 하양 허씨 문중이 주도한 후원으로 편찬된 읍지였다. 국역작업 후 종친 어른께 혼도 났지만, 읍지편찬의 필요성과 의미를 깨쳤고 언젠가 제대로 된 읍지편찬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 지역개발사업으로 대학리와 서사리가 사라질 상황에 처하여 더 늦기 전에 후세에 남길 읍지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집필진과 재원문제로 2~3년 고민하다가 황관식 하양읍장의 호응과 최영조 경산시장의 지원으로 2016도에 예산을 세우고 금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현재 마무리 작업 중이다.

 

현재 쟁점은 현대인물을 어느 범위까지로 게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말썽의 소지가 많은 부문이나 작고하신 분들만 게제 하는 방향으로 정리 될 듯하다.”

 

지난 9월 하순, 읍지편찬위원회 회의 때 보니 공비들에 의해 하양면사무소가 불탄 날짜 등 기록에 없는 사건들을 정확하게 기억하시던데 평소 일기를 쓰시는지?

 

일기를 쓰는 것은 아니나, 지역의 주요 대소사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잊혀지지 않는 큰 사건들을 기억하는 거라고 보면 되겠지. 194910월 도리운동장에서 면민체육대회가 열렸는데 이날 밤에 공비들이 면사무소를 방화했고 전소되어 같은 달에 면사무소를 현재 하양초등 옆 금락리로 이전했다는 식으로 기억하는 거지

 

군대에 간 3년을 제외하고는 줄 곳 한사리에서 사셨는데 평생 고향을 지키면서 사신 소회는?

 

한사리 540번지에서 출생했고 결혼해서 살림난 집이 576-3번지인데 거기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네 그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잖은가. 강바닥의 자갈돌처럼 능력이 모자라고 힘이 없으니 이렇게 머물러 있었던 거지. 좋게 말해서 고향을 지키는 사람이지, 옛날로 치면 선산을 지키며 사는 갓지기라 했겠지. 산을 지켜야만 떠나간 사람들이 죽어서도 돌아올 수가 있으니 나름 의미는 있네만 고향에서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출향인사들이야 고향에 와서 열만 해도 열다섯을 한 만큼 빛이 나는데, 고향에 머물러 살고 있으면 열다섯을 해도 열을 한 만큼도 인정받기 어렵다네. 먼 곳에 있는 사람보다는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게 세상물정이 아닌가.”

 

성장과정과 하양에 정착한 계기?

 

중고등시절부터 이야기해야하니 이야기가 길어질 걸세. 하양초등을 졸업하고 대구사범병설중학교로 진학하였네만 6.25전란 시절이라 기차를 타고 하양에서 대구까지 통학하면서 공부한다는 게 참 어려웠네, 당시 전시물자수송을 우선하는 RTO기차(TMO)를 타면 대구역에서 경주로 오후 5시에 출발하는 기차가 밤 12시에 출발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어. ‘썸머타임으로 여름철에는 매일 1시간 지각, 겨울철에는 1시간 일찍 설렁한 학교로 등교할 수 밖에 없었어. 난리통에 도시락 사갈 형편이 안 되어 배를 많이도 골았지. 물이 줄줄 흐르는(더운밥이 식으며 맺힌 물) 새카만 보리밥 도시락을 교실 한구석에 숨어서 몰래 먹곤 했지.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립인 대구상고로 진학했고, 몸이 좀 빵빵하다보니 럭비부 선수로 지목되었어. 럭비선수가 되기 싫었던 나는 도망 다니다가 두들겨 맞기도 하고 그러다 2학년이 되어 남들보다 1년 늦게 럭비를 시작했지. 후보로 전국대회인 종별선수권대회까지 출전하기도 했지만 운동으론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럭비부를 그만두려고 빠따’ 30대를 맞고 합숙훈련장을 빠져나왔어. 그러다 보니 공부를 정상적으로 못했어. 대학 갈 형편도 안 되고 그래서 졸업 후 한동안 집에서 책 읽고 운동하며 울분을 삭히고 있었어. 그때 동아일보의 단상단하라는 유명했던 정치풍자를 비롯한 신문 기사 전체를 하루도 빠짐없이 다 읽고 지내던 기억이 새롭네.

 

그러다 하양중학교 행정담당 겸 체육 강사로 임용되어 고향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됐어. 21개월 근무 후 입대했고 육군병참학교에서 34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결혼하고 복직하여 20년 가까이 근무했지. 공민과목인 일반사회 수업도 하고 지역의 각종 단체에도 참여하여 사회활동도 하고...

 

그렇게 20여년을 지내다. 1988년에 신라섬유에서 현재의 동부고등학교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여 행정실장으로 일하다 96년 예순이 되어 퇴직했어. 더 오래 학교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지만 당시 나이 70대인 선배들이 많이 작고하는 것을 보고 이제 지역을 위한 일들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퇴직했지.

 

이제 와서 돌아보면 고향을 위해 무얼 하겠다는 생각으로 고향에 머문 것은 아니고, 직장인 학교가 하양에 있다 보니 자연히 고향에서 살게 되었고, 고향에 살다보니 행동거지를 조심해야했고 지역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많아 졌다고 해야겠지.“

 

평생 하양에 살면서 공동체(지역사회)를 위해 애쓰신 일들은?

 

좁은 지역에서 살아오면서 남들에게 손가락질 안당하고, 선생소리 듣고, 명절에 외롭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찾아주니 잘 산거지 뭘 남겨야하나. 자꾸 말하라고 하니 몇 가지 이야기는 하겠네만 자랑거리로 각색은 하지 마시게.
 

       ▲ 육영재 총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최재림 선생. 
 

 

나는 윗대의 좋은 전통과 정신을 계승·보전하는 것과 치인(治人)은 못하더라도 수기(修己)를 늘 삶의 근본으로 생각했다네. 그런 생각에서 문중 총무를 9년이나 맡았고 경산총친회장으로도 활동해왔네. 대학리 선영이 군부대에 편입됨으로써 불거진 복잡한 문중재산 문제를 하나하나 모두 발품을 팔아 해결했네. 해결에 도움을 준 변호사와 세무사들이 3년 이상 소송에 매달리고 대법원 판결까지 받아야 해결될 문제라고 하더군. 한편 재산목록 작성, 회계 및 관리사항 기장처리, 회의공개 등 문중행정을 체계화하고 관리를 현대화 했어.

 

밖으로는 유림 일에 20년 넘게 관여하고 있네. 하양향교에서 문중대표로, 수석장의로, 27개월간의 전교로, 육영재 훈장으로 활동했고, 2015년부터 2016년까지 2년은 경산시유림연합회장을 역임했네. 지금도 4년째 경상북도 향교발전협의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어.

하양향교 전교시절 하양향교의 내외삼문
, 동재, 전수청 등을 정비하고, 도내에서 3개뿐인 육영재(지역의 우수인재를 선발하여 성균관 진학을 위한 특별교육을 시키던 조선시대 사립 영재교육기관, 대구 · 경북에는 대구의 낙육재, 영천의 삼일재, 하양의 육영재가 있음)훈장으로 육영재 보존을 위한 경북도 지방문화재 신청, 진입로 개설, 주차장 확보를 했다네. 육영재 진입로 개설을 위해 대구에 거주하는 한 토지 소유주를 일곱 차례나 찾아가 토지매각을 설득하였으나 끝내 거부하여 할 수 없이 진입로를 꾸불꾸불하게 개설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육영재의 상징적 의미와 보전의식을 되살린 보람은 있네.

 

2014년 말부터는 경산북부노인복지회관 경로당의 사정이 어렵다고 책임을 맡으라고 해서 노인회 분회장을 맡아 건축한지 30년이 되어 시설이 엉망인 경로당을 5년째 보수해오고 있네. 이제 보수가 거진 완료되었네.

 

이밖에도 60년부터 하양체육회, 청년회 활동을 지속해왔고 하양초등총동창회장, 하주초등학력관리위원장 등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소임을 맡아 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네.

 

순수한 민간단체인 경산번영회(5년째 회장을 맡고 있음)를 통해 우리 전통을 지키고 민주시민의식 제고를 위한 강연, 안보교육, 유림 및 새마을지도자들의 구정 신년인사회 등의 행사도 개최해오고 있지. 간혹 일반사회과목을 가르친 경력으로 강사로 나서 직접 강연도 해왔네. 일지회를 통해서는 윤리와 도덕이 숭상되는 더불어 행복한 사회 만들기 운동도 전개하고 있네.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동네일에서부터 불우이웃돕기까지 성심껏 참여하고 씨 뿌리는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하네.

 

일례를 들면 관계요로에 다니며 지원을 요청하여 한사리 마을회관을 짓고 보니, 마당이 비좁아 마당을 늘려 정원까지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마을이장에게 사비 일백만원을 건네며 이 돈을 종자돈 삼아 기금을 좀 모아서 마당을 넓히고 정원도 만들라는 조언을 했어. 10년이 지나 일천여 만원의 기금이 조성되어 회관마당을 확장할 부지를 매입할 수 있게 됐지. 동네 노인회 기금을 보태어 부지를 매입하고 시로부터 공사비를 지원받아 동산을 조성하고 팔각정을 설치하니 보기가 좋았어.

 

더욱이 1715년까지 하양고을 소재지가 한사리임을 기념하여 팔각정 이름을 동헌정(東軒亭, 고을의 수령이 정무를 돌보다 쉬는 정자)이라 편액 하니 흐뭇했네.”

 

하양지역의 문제점과 개선책은?

 

흔히 경산의 세 고을(하양, 자인, 경산현)을 이야기 할 때 하자경이라 부르네. 왜 그렇게 불리는지 아는가. 세 개 현이 합쳐져 경산군이 된 오랜 기간 동안 세 고을 중에 하양이 그중 인물과 문화가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 졌다고 보네. 경산에는 사액서원이 하양의금호서원밖에 없는 점이 이를 말해주지.

 

현대에 들어와서는 한때 하양에서는 점심으로 비빔밥 한 그릇 먹고도 노래한다.” 라는 소리를 듣던 시절도 있었으나, “노름꾼 많고 깡패 많다.” “선후배간 위계질서가 제일 없는 곳이 하양이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위계질서와 도덕이 무너진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하네.

 

이제 하양에 거주하는 순수 토박이는 30%도 안 된다고 보네. 선조들의 좋은 정신과 전통, 지역의 역사를 알고 각자의 근본에 충실해야 우리 사회가 바로 선다고 보네.

 

각 가정과 문중, 지역사회 안에서 위계질서와 도덕을 바로 세우는 길 이외에 달리 방도가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선생께 고향(하양)은 무엇인지 물었다.


한마디로 하양은 나의 삶이다. 내 삶의 전부였다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필요 없는 대답을 주셨다.

 




 

최상룡(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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