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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임춘 교장신부님
<제4편> 전 생애를 통하여 보여준 환원의 삶
기사입력 2019-12-21 오전 9:44:18
학교 내 교실에서 기거하며 보여준 희생적인 삶
1976년, 학교 앞 도리동에서 양계장을 운영하던 질녀의 집에서 거주하고 있던 신부님이 학교 안으로 거처를 옮겼다. 중학교 교사 2층 동쪽 끝의 창고로 쓰던 작은 공간에 냉난방시설도 없이 침대하나 놓고 기거를 시작했다. 1985년 진량공소로 옮겨 갈 때가지 10년을 이곳에서 지냈다. 자신의 인생을 포함하여 가진 모든 것을 학교와 학생들에게 쏟아 붓기 위한 자신의 의지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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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 거주하시며 교정을 즐겨 걸으시던 모습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내기 어려운 학생들을 위하여 장학금을 늘리고 학비를 제때에 내지 못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아 학교경영에도 어려움은 계속됐다. 신부님에게도 이 시기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였지만 내색도 하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의 의지를 삶으로 보여 주었다.
신부님이 몸소 보여준 가난한 삶을 통하여 학교는 초기의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흔들림 없는 성장의 시기로 나아갈 수 있었고, 대대로 내려온 이 지역의 고집스런 민심은 조금씩 두꺼운 껍질을 벗기 시작했다.
신부님의 이러한 삶의 모습은 지역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중 고등학교는 신설학교의 어려움을 딛고 빠르게 지역민의 신뢰를 얻는 밑거름이 된 것은 말한 나위가 없다.
진량 공소에서의 보낸 10년
스스로의 일에 대하여 누구로부터 평가를 받거나 칭찬을 받는 것을 꺼려하셨던 신부님이지만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1983년 12월 20일 경북교육상, 1984년 4월 27일 경향사도대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그리고 당시 효성여자대학의 전석재 총장신부님을 도와 대학이 하양으로 이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여자 대학에서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는 과정에도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1986년 8월 학교운영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무렵 10여년의 불편한 학교내 생활로 건강이 나빠져 숙소를 옮겨야했다. 진량교우들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진량공소부지에 교우들의 모금과 신부님 사재 2,000여만을 출연하여 40여 평의 건물을 신축하여 진량으로 거처를 옮겼다.

▲ 진량성당
본당사목을 떠난 지 10년 만에 다시 교우들의 품으로 돌아온 신부님은 학교장직을 수행하시면서도 교우들을 돌보는 일에도 많은 열성을 기울였다. 당시 신자들이 불과 40여명에 불과했지만, 언젠가 진량이 크게 발전 할 것을 예견하고 진량공소가 본당이 될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주일 미사는 물론 평일 미사를 매일 봉헌하였고, 예비자 교리반과 주일학교를 개설하여 지역의 복음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부님의 선종 후 불과 3년 후인 1997년 9월 진량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됐다. 신부님은 진량공소에서의 삶이 사제로 살아온 평생을 돌아보면 가장 행복하고 걱정이 없었던 시기였다고 자주 회고하곤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 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해 줄 것인지를 생각하면 마음의 평화가 온다고 자주 언급하셨다.
갑작스러운 선종
평소 혈압이 높았던 신부님은 1994년 11월 10일 출근시간, 진량공소 사제관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한마디의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2주 후 11월 24일 많은 이들의 기도 속에서 67년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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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종하시다.(1994.11.10.)
남산동 주교관에 빈소를 마련되었고 11월 27일 남산 성당에서 장례미사가 엄수되어 성당에서 묘지까지 무학고 학생들이 도열하여 배웅하는 가운데 성직자 묘지에 안장 되었다. 평생 사용한 침대와 손 때 묻은 기도서, 몇 가지 성구와 보온 도시락이 유품의 전부였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신심과 열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무학중·고등학교를 넘어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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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학고 내 기념관 전시실
“나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 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해 줄 것인지를 생각하면 마음의 평화가 온다.”
※ ‘아 이임춘 교장신부님’은 5회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이 글은 박경현 무학고등학교 교장(무학중 7회 무학고 1회 졸업생)께서 쓰신 것을 일부 고쳐서 편집하였음 알립니다.
최상룡(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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