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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의 가계와 일생
제3회 삼성현학술대회, 발표논문 요약 게제
기사입력 2018-10-16 오후 4:47:17

▲ 경산의 삼성현 설총 영정그림
지난 12일, 삼성현역사문화관에서는 제3회 삼성현 학술대회가 개최됐다.
지난해에는 원효성사 탄신 1400주년 기념하여 원효성사에 대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고 금년에는 “설총과 문자 그리고 신라의 유학”을 주제로 설총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열었다.
이날 발표내용 중 동국대 역사교육과 윤선태 교수가 발표한 “설총에 관한 인식의 변화”라는 논문의 요약을 게제한다. 윤교수의 발표문은 삼국유사 기록을 중심으로 인식했던 설총에 대해 삼국사기 등에 비추어 객관적으로 인식의 변화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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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대에 작성된 서당화상비와 원효행장, 그리고 삼국사기 설총전에 의거해 설총의 가계와 일생을 복원하면 다음과 같다.
설총은 京師人(서라벌 사람)이었다. 字는 聰智이며, 曾祖는 仍皮公(또는 赤大公인데 일연 당시에도 赤大淵 옆에 그의 廟가 남아있었다), 祖는 談捺奈麻, 父는 元曉이다.
원효는 일찍이 불가에 귀의하여 불서에 능통하였다. 661년 이후 환속하여 小性居士라고 自號하며 僧俗不二를 실천하였는데, 이 무렵 聰을 낳았다. 총의 어머니는 알 수 없다(향전에는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궁주라고 하나 믿기 어렵다).
총은 天性이 明敏하여 나면서부터 道術을 깨달았다. 관료가 되어 신문왕께 우화로 ?花王戒?를 지어 바쳐 王者의 도리와 政治의 요체를 깨치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총애를 받아 國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六經과 文學을 方言으로 가르치기 위해 경전에 우리말로 해석을 표기하는 ‘구결토’를 발명하였다. 이러한 설총의 경전 교육방식은 신라 멸망기까지 지속되었다. 설총은 성덕왕대 후반까지 관료로 활동하였다. 당시 국왕의 명으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를 작성한 ‘奈麻 聰’이 바로 그였다.
설총의 아들은 仲業으로, 아버지를 이어 관직에 나아가 더욱 문명을 떨쳤다. 799년에는 일본에 대판관으로 使行을 갔다. 당시 일본의 재상이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에 깊이 빠져 탐독하고 있었는데, 원효의 손자가 일본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설중업을 만나 여러 차례 극진히 대접하고 또 원효를 경모하는 시를 써주었다.
원효가 세계적인 사상가임을 자각한 설중업은 귀국 후 신라의 불교를 새롭게 정리하고 계승하려했던 각간 김언승의 마음을 움직여, 안홍의 비를 직접 찬술하고, 여기에 안홍의 후계자로 원효를 내세워 그의 불교사적 위상을 재확립하였다.
이를 기초로 분황사에 원효의 居士像을 안치하는 등 원효를 현창하는 사업을 지속해갔고, 마침내 ?서당화상비?의건립까지 성공시키게 된다. 이후 원효는 신라 10聖의 하나로 흥륜사 금당에 봉안되었다.
고려에 들어와서 설총의 위상과 인식에 변화가 일어난다. 고려 초기에는 최언위나 최행귀와 같은 중국유학파들의 정치적 역량이 컸고 중요한 역할도 수행하였다.
그러나 광종대에 과거제도가 자리를 잡고 성종을 거쳐 현종대에 이르면서 고려 정치계에서 중국 유학파는 급격히 사라진다. 이제는 국학이 國子監으로 발전하면서 권력자를 배출하는 가장 중요한 창구가 되었다. 당연히 설총의 구결토 교육방식은 유학을 배우려는 관인예비군들 모두에게 입문서가 되었고, 설총의 구결토를 배운 학생들 중에 고려의 왕후장상이 나왔다.
이로 인해 현종 13년 설총은 ‘弘儒侯’로 추봉되고 문묘에 배향되기에 이른다.
설총의 봉후가 ‘弘儒’, 즉 유학의 저변을 넓힌 공이라는 사실도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이로 인해 ??삼국사기?? 찬자도 설총에 대해 “지금도 學者들이 그를 宗으로 삼는다.”는 찬사를 덧붙이게 된다. 고려 후기에는 설총을 ‘儒宗’으로 더욱 부각시키려는 내러티브(실화나 허구의 사건들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구조적 형식, 일종의 스토리텔링)들이 생성된다.
설총의 가계를 더욱 높이기 위해 그동안 어떠한 자료에도 보이지 않았던 설총
의 모계를 태종무열왕의 딸(요석공주)로 재구성하였다. 또 원효가 노년에 머물던 穴寺 근처에 설총의 집이 있었다거나, 돌아가신 뒤에 흙으로 원효의 소상을 만들고 경모의 뜻을 극진히 표하는 배례를 올렸다는 내용도 부가하였다.
이는 고려의 ‘儒宗’다운 유학의 덕목을 실천하는 설총의 일상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해 과거 설중업의 원효 현창사업을 설총의 것으로 새로이 전유하며 만들어진 설화였다.
최상룡(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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