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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6-06-23 오후 1:31:00

[왕비재테크] 돈 밝히는 여자
부동산재테크 그 첫 걸음마

기사입력 2007-03-06 오전 11:38:53

 

 나의 길을 돌아보며

 - 1장 망해도 내가 망한다

 

사실 내 경우라서 적잖은 부담을 느낀다.

왜냐면 난 이 카페 메인의 글처럼 사람이 적게 간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먼저  편견을 버리자.

아마 내가 이글을 쓰는 이유또한 그것일 것이다. 난 정확히 10년 전에 재테크에 입문했다.

 

23살 가을부터...

개인적으로 재테크에 대한 준비는 그 이전부터였고 난 결혼과 동시에 재테크 중에서도 부동산재테크만을 선택했고 시작했다.

그 당시엔 주식이 대다수 사람들의 재테크 수단이었기에...

난 사람이 적게 간 길이라고 믿었다.

그래선지 역경이 나름대로 많았다.

여기서 역경이란 부동산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시대였다.

 

예로 한동네에 부동산 사무실이 한두개가 고작이었고 인터넷이란 건 생활화되지도 않았을 때라서 지금처럼 이런 카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가  휴대폰이 겨우 상용화 될 쯤인 것 같다.

울 신랑이 무전기를 들고 다닌 기억이 나는걸 보면 그래선지 난 상가를 알아보면서 길거리 공중전화박스를 많이 애용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무지 우습다.

왜냐면 부동산 삼실 앞까지 갔는데...

중개사분이 집보러 사무실을 비우면 전화번호를 메모하고 왔다가 그 뒤에 다시 해보고 미팅을 했던것 같다.

 

그리고 그 당시에 집 보러 다닐 때도 역시나 애로 사항이 많았다.

집 보러 집 앞에 갔는데 없는 경우엔 주인이 올 때까지 그냥 기다려야 했다.

헉 그런 시절 난 맞벌이 하면서 주말마다 집을 보러 다녔으니 그 여름의 수고가 기억난다.

어떨땐 삼실에 가면 스물을 갓 넘긴 여자가 상가를 보겠다고 하니 물건 빼내는 스파인줄알고 의심부터 했고 , 어떨땐 나이 어린게 상가를 보러다닌다고 하니 , 많이들 의아해 하면서...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확연하게 느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래선지 지금 돌아보면  내가 그때 돌아다니며 본 물건 중에는 영 아닌 것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에피소드는 내 삶에서 많은 경험을 주었다.

그리고 내가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승부욕을 느끼게 한 길이었다.

왜냐면 그 길은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 수풀이 우거진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난 갖은 에피소드를 만들고 1998년 imf 때 3억5천 급매물을 2억3천에 매입을 했다.

전세자금 2900만원을 막대금으로 하고 보증금1억을 안고 우리가 결혼 3년동안 맞벌이 하면서 모은 돈 7천만원 ,그리고 나머진 대출을 받고 시작했다.

 

하나 취등세 등록세가 문제였다.

빚이야 우리의 월급으로 가능하지만 바로 한달안에 다 정리해야 하는 세금과 이사비용까지 참고로 그땐 포장이사 비용이 참 고가여서 우린 내가 직접 다 싸다가 날랐다.

그 부른 배를 안고서...

부른 배라고 하니 생각난다.

막대금은 주기로 했는데 살던 집이 나가질 않았다.

불안한 하루하루였다 정말 그런 심정은 경험 해보지 않고서는 가름하기 힘든 부분이다.

 

주인은 배째라 였고 내 맘대로 2천에 전세 놓고 나머지 9백은 주인한테 달라고 했다.

싸게 라도 일단 놓코 차액을 주인한테 달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초짜치곤 난 나의 감과 나의 대체능력을 과히 칭찬해 주고 싶다. 고수라긴 뭐 하지만 초짜의 딱지를 띤 지금에 생각해보면...

또 난 나머지 돈 900을 돌려받기 위해서...

그 짐들을 내가 다 주인집 3층에 올려다 두고 거기서 돈 줄때까지 안 나간다고 그 주인집 식구들을 돌아버리게 만들기를 며칠~~~

겨우 막대금 치는 날!!! 

 

울며 겨자 먹기루 배부른 아줌마의 무식용감이 덕을 보던 날이었다.

지금이야 나의 신용으로 그 정도라면 충분히 카바가 되지만 그때 난 돈900만원 때문에 집 등기 못하는 줄 알고 불안에 떨 만큼 신용마저 사회초년생 시작이었다.

그렇게 난 많은 우여곡절 끝에 이 집으로  입주를 했다. 그리고 등기하고 얼마 뒤에 세금 영수증이 날라왔는데...

돈이 없었다.

미치는 줄 알았다.

있는 돈 없는 돈  싹싹 다 털어 집은 샀는데...

세금이 내 코를 석자로 만들었다.

 

돈이 없어 도배장판도 안하고 이사도 우리가 나르고 큰 짐만 용달을 불렀는데 나의 성격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그때 남겼다.

돈을 빌려달라기에 입에서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정말 돈 빌려달란 소리를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욕이 나를 구원해 주지는 않는 법

 

죽어도 할 수 없었던 말을 가까운 친척들에게 해봤다.

그런데 집을 사면서 빌려달라는 건대도 아무도 날 믿지 못했다.

되려 미친년이란 소리만 들었다.

특히 시댁의 사촌 동서들은 나를 대놓고 모자라는 여자로 취급했다.

망하고 싶어 약 쓰냐고 미쳤다고 아파트 안사고 그 땡빚내서 상가주택 사냐고 가까운 친척들마저 등을 돌렸다.

그럴만큼 이른 나이의 상가주택은 미친 짓으로  우릴 모두 다  믿질 못했다

 

해서 10년 지기 계돈을 빌리기로 했는데...

계주가 일일이 다 물어는 봤는데 싫다고 했단다.

갠적으론 냥 혼자알고 융통성 발휘해 잠시만 빌려주면 싶었지만 사람 맘이 내 맘 같을 수 있으랴.

참 그때 우린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는 받지 않았다.

사실 둘 다 직장이 있었고, 그땐 카드발급이 쉬운 터라서 충분히 가능했지만 내 철칙이었다.

남들이 아주 쉽게 급한데...

그런 철칙이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한다면 할말이 없지만 나는 어떤 세워진 선에 대해선 철칙을 원칙으로 하고 산다.

우리 아직 현금서비스란 걸 받아본 이력이 없다.

아니 꼭 그렇게 해야 한다.

 

경제개념이 앞섰던 터라 현금서비스도 신용등급 설정에 마이너스 해당사항이 된다고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미친년이란 소리를 들으면서 세금 400만원을 머리 조아려 빌렸다. 그리고 월급을 받자마자 그 돈부터 젤 먼저 갚았다.

은행이자는 얼마를 더 물더라도~~~

그리고 그 철칙 중에 하나가 난 죽을 때까지 돈은 은행돈 만 많이많이 빌릴 거다.

 

그래서 그렇게 난 그 부른 배를 안고 낮엔 병원을 다니고 ,저녁엔 개인적인 투잡을 했으니 어찌 뼈에 안 사무치랴!

그때 나는 맹세했다.

내 사전에 남에겐 십원도 빌리지 않으며 십원도 빌려주지 않는다.

난 죽고싶을 만큼 나의 신용과 나의 인간성을 돌아봤다.

그런데 중요한건 돈이란 건 냉정하단 거다.

없는 내가 미친 짓 하는데 투자할 사람이 불안한 거지 빌려주지 않는 그 사람을 탓해선 안 된다고 말이다.

 

그때 난 첨으로 무능한 내 부모와 관심없는 시댁어른들은 내가 짊어지고 갈 산인걸 알았다.

난 아직도 양가 부모님 생활비를  내가 보태어 드린다.

그리고 난 그 시기에 죽고 싶을 만큼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폭풍 속 풍랑이었다 !

풍랑속에 부서진 배 조각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거센 파도였다.

나는 바다 깊숙한 그 어느 곳까지 빠져들어 다시 세상을 만날 수 없다고만 믿었다.

 

그럴만큼 내 인생의 새로운 출발 앞에선 첫 시련이었다.

미치도록...몸부림을 칠만큼 나를 미워했다.

죽고싶었다!!!

죽고싶은 이유는 내가 집을 사고 채 보름도  되기 전에 일이다.

왜 하필 그때 ??? imf 때 우리 친정 부모님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한달 사이로 우리 시아버진 주식으로 4천만의 빚을 지고 새마을금고에 집이 넘어간다고 통보가 왔다.

일주일 안에 상환하지 않으면 아파트 넘기겠다고 자식들인 우리에게...

이 무슨 악극같은 대본인가????

완전 피박에... 쓰리고에...또 뭐 있지?

솔직히 다행인건 그때 울 부모님께선 가지고 계신 돈이 조금 있어 그 돈을 내가 가져와 건물을 또 매입했다.

 

울 부모님은 나만 믿는다고 하셨고 그 나이에 남의 집 세를 사시게 하고 싶진 않았다.

눌려오는 부담감에 ... 난 내가 임신을 한 산모임을 가끔을 잊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사실 나의 적잖은 계산도 없진 않았다.

 

울 집근처엘 구했다. 아이양육을 부탁할 요량으로 해서 건 그 건물 담보로 부채만 우리가 고스란히 떠안고 명의만 울 부모님 앞으로 해 드렸다.

일단 울 부모님 살집이 마련할 수 있어 다행이었고 담에 울 부모님께서 재테크를 하셔도 되기에 대신 그 조건으로 죽어두 애는 안 봐주신다더니 애도 봐 주겠다고 하셨고 내 집 인근이라 내게 안성마춤이었다.

아이양육에...그런데 부모님이 자립을 하시게 되시면서 애는 6개월 만에 시이모님께 맡겨야 할 만큼 울 부모님은 냉정하셨다.

 

원망도 후회도 그때 다해 봐서 난 누굴 탓하거나 변명하는 걸 젤 싫어하게 되었고 난 내가 젤 중요한 자산임을 그때 뼈져리게 느꼈다

부모도 자식이 효를 할 때 인정을 해주고 근데 그 효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걸 터득했다.

 

난 일단 이자 갚아나가는 조건으로 건물 2개는 가능하다고 믿었었다.

또 난 가족이란 울타리마저 보호받지 못 할만큼 내 배경은 궁핍했다.

그게 우리 시댁사건이 터지기 전이였으니까 그렇게 울 친정 부모님께서 6개월까지 울 승현이를 봐주셨다.

 

그리고 왜 하필 그때 울 아버님 나의 목을 조르시는지...

난 정말 물려받은 재산은 없었지만 내 인생을 개척하며 잘 살고 싶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어떻게 내가 모은 돈인데...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고 배불러 입덧해가면서 몇 달을 먹지 못해도 놀 수 없는 처지에 병원에서 내 아픈 건 뒷전이고 남 아픈거나 돌보면서 일하러 다녔는데...

 

나의 넘치는 감정은 그칠 줄 모르는 폭우였다.

그런데 그게 부모자식인걸 어떡하랴.

달랑 형제뿐인 울신랑 한집에 2천씩 내야했다.

그때 우린 내 패물이랑 울 신랑 패물 뭐 돈이 되는 건 다 팔았다.

그리고 제2금융권에 확정이자 18%를 무는 조건으로 남은 빚은 우리가 떠안았다.

 

그때 난 죽어도 운이 없는 아이인줄로만 알았다.

스물여섯에 내가 감당하기엔 진 빚이 넘 많았다.

매일 울었다

서러워서 울었고

아까워서 울었고

부모가 미워서 울었고

사는 게 힘들어서 울었고

우는 데는 이유가 없었다.

정말 매일 수도를 틀어 낙동강으로 흘려 보냈다

 

그때 내 옆에서 같이 해준 나의 벤치마킹 언니. 대백프라자 데려가서 그 비싼 과일과 내가 먹고 싶은 것들을 주저리 사주면서 애 놓고 울라고 했다.

해서 난 울음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신 울진 않는다고 맹세했다.

미치도록 내게 해준 것 없는 양 부모였지만 내 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새로운 인생을 살거라고 다짐하면서~~~

그리고 미친년 잘살아 보자고~!!!


나의 길을 돌아보며~~~2부에서...

 

 

 

 


    <왕비 권선영씨>

-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왕비의 부동산 재테크'   카페운영

 

-  재테크 경험담 왕비 재테크 출판

(제공=대구인터넷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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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 기자(ksinews@hanmail.net)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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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자경제학
    2007-03-11 삭제

    일찍 눈뜨고 천천히 서둘러 행동하는 분이시네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안목, 그리고 실천. 박수를 보냅니다.

  • 재테크초짜
    2007-03-09 삭제

    우와..어린나이부터 정말 대단하시다..!! 역경과 고난을 잘 이겨내신 듯..하여간 나는 못할 것 같애. 정말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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